28. 국밥 한 그릇과 찔레꽃

일상의 온기와 예술의 향기가 만난 날

by 허정호

일상의 온기와 예술의 향기가 만난 날

1. 돼지국밥 한 그릇

찔레꽃 향기가 퍼지는 5월의 토요일,

결혼식에 다녀온 아내와 나는 뷔페를 뒤로하고 시골집 마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늘 눈여겨보던 국밥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손님은 없었지만 넓은 홀에 가지런히 놓인 탁자들이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서툰 한국말을 쓰는 베트남 이모가 물을 내려놓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메뉴판 맨 위에 있는 돼지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김치, 깍두기, 땡초, 양파, 된장, 새우젓, 큼직하게 썬 부추까지

정갈한 반찬들이 탁자 위에 올랐다.

뚝배기를 휘저으니 고기가 절반이나 들어 있었다.

들깨가루를 세 숟가락 넣고 부추를 듬뿍 얹었다.

너무 많이 넣었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내는 시원한 국물맛이 좋다며 들깨를 넣지 않았다.

고추장을 풀어 맛을 보려다 “앗, 뜨거!”

그대로 삼켰다가는 식도가 데일 뻔했다.

들깻가루 덕분에 국물은 탁해졌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맛이 났다.


2. 찔레꽃 공연

일주일 뒤, 시골집 인근 금포림에서 열리는

‘장사익의 찔레꽃’ 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국밥집에 들러 포장을 했다.

“밥도 주세요.”

주인아주머니가 반찬과 국밥을 챙기는 동안,

베트남 이모는 면장갑을 낀 손으로 보온통에서 밥을 꺼내

흔들어 툭 담았다. 그 동작이 괜히 정겹고 재미있었다.

요즘 시골집은 보랏빛 수레국화와 하얀 사스타베이지가 마당을 꽉 채웠다.

지난봄 곡성에서 가져온 장미 두 그루도 붉고 노랗게 피었다.

포장해 온 국밥은 냄비에 넘칠 만큼 푸짐했다.

“이 정도면 내일 아침도 해결이네.”

괜히 마음이 든든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이 시골에 누가 공연을 보러 오겠어’ 싶었는데,

주차 안내원이 자리를 내어주며 말했다.

“빨리 가보소, 곧 끝날라카이.”

부랴부랴 들어가니 무대에서 ‘장사익의 찔레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곡인 줄 알았는데, 어둠이 내려도 노래는 계속 이어져,

‘동백아가씨’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3. 장사익 선생님과의 우연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한꺼번에 빠져나왔다.

주차장은 순식간에 뒤엉켰고,

우리는 찔레꽃 둑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노을빛을 받은 하얀 찔레꽃이 둑길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둠 속의 찔레꽃은 낮보다 더 환했다.

둑을 되돌아오는 길, 뜻밖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대에서 내려온 장사익 선생님이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선생님이 환히 웃으며 답해 주셨다.

그리고는 “사진 같이 찍을까요?”

그 한마디에 우리는 숨을 죽였다.

그 길에서, 하얀 찔레꽃을 배경으로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한 장의 사진이 그렇게, 봄날의 추억이 되었다.


4. 다시 국밥, 그리고 찔레꽃

다음 날, 어둠에 가려 잘 보지 못한 찔레꽃을 보러 갔다.

둑길에 줄지어 선 찔레꽃이 이슬을 머금고 반짝였다.

다섯 장 꽃잎 속의 노란 꽃가루가 더욱 선명했다.

‘장사익 찔레꽃 뚝방길’ 표지석 앞에서

내년에도 꼭 오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와 호밀식빵에 과일과 계란프라이를 얹은 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금세 배가 고파왔다.

냉장고 속 남은 돼지국밥을 꺼내 데웠다.

아내는 텃밭에서 대파를 뽑아와 송송 썰어 넣었다.

뚝배기에 밥을 말아 한 숟가락 떠 넣으니

고소한 국물 향이 입안에 번졌다.

역시 국밥은 밥을 말아야 제맛이다.

찔레꽃도, 국밥도, 사람의 마음도

하루가 지나야 비로소 깊어지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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