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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 Nov 16. 2024

피리 부는 사나이를 한자로 쓰면

 김첨지, 박첨지 모두 다 僉봤다는데...

1284년 6월 26일, 독일의 베저 강가에 자리 잡은 평화로운 도시 하멜론에는 아주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130명이나 되는 도시의 아이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길거리로 몰려나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행렬은 마치 음악대가 행진하는 모습 같았다. 맨 앞에서 걷고 있는 남자는 머리에 커다란 붉은색 모자를 쓰고 피리를 불고 있었다. 아이들은 마법에 홀린 듯이 남자의 피리 소리를 따라 마을을 떠났고 그 이후 이 아이들을 본 사람은 없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독일 하멜른에서 전승되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동화이다.

하멜른은 평화로운 도시였다. 방앗간에는 곡식 찧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복은 쥐떼들이 모두 앗아가 버렸다. 어느 날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쥐들은 밤낮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여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때 마을에 낯선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시장을 찾아가 쥐떼를 마을에서 몰아 내주겠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동의했다. 놀랍게도 남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피리 소리로 쥐떼를 유인해 강가로 이끌었고, 쥐떼들은 모조리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사나운 군대 귀신들을 돼지떼에 들게 하여 바닷속에 수장시킨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여하튼 막상 쥐떼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마을 사람들은 언제 그랬는 듯  약속을 저버렸다. 이에 화가 난 남자는 복수심에 다시 피리를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쥐떼가 아닌 아이들이 피리 소리를 따랐다.


독일에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있다면, 신라에는 만파식적이 있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쪽 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후에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폭풍이 일어났는데, 작은 산 하나가 파도에 떠밀려 감은사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신문왕이 전망대(利見臺)로 가서 보니 감은사로 다가오는 작은 산은 그 생김새가 거북 머리 같았다. 산 위에는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폭풍이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바다가 잠잠해지자 왕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산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 산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왕이 그 대나무를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이 피리를 불면 신기하게도 평온해졌다. 이에 피리를 불어 온갖 파도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 하였다.


사람이나 동물을 유혹하고, 심지어 세파까지 평온하게 만드는 신기한 피리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답은 화할 화자가 보여주고 있다.



화할 화和입 구벼 화 또는 나무 목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갑골문은 입 구 대신에 피리 약자를 썼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화는 원래 곡식의 잎이나 나뭇가지로 만든 호드기(풀피리)를 뜻했다. 예전에 아이들은 봄날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면, 그 껍질을 비틀어 풀피리를 만들어 불었는데, 그 모습을 뜻한 것이 화할 이다. 벼 화는 여기서 보리 따위의 곡식의 잎을 따서 만든 풀피리를, 목은 버드나무나 혹은 미루나무 가지로 만든 피리를 뜻한다. 아이들이 호드기를 입에 물고 서로 화답하듯이 "호득 호득" 피리를 부는 모습에서 '조화, 화답'등의 뜻이 나왔다.


의 처음 형태인 갑골문 화는, 호드기를 뜻하는 화禾에, 다관피리를 그린 피리 약을 더해 다관피리가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화음을 뜻했다.


결국 만파식적은 임금과 백성이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피리는 가장 원시적인 악기이다. 초기의 형태는 갈대나 대나무 따위의 관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은 형태였다.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7대째 되는 가인의 후손 유발이 "피리를 부는 모든 사람의 시조"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할릴'이라는 피리는 모든 관악기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악기였다. 결혼식 연회나 종교 행사와 같은 축제에서뿐만 아니라 장례식에서도 연주되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그 연주장면을 따라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하멜른의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마을을 떠나는데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그리스 신화에서도 피리 연주로 유명한 한 사나이가 등장한다. 이 사나이는 하멜론의 피리 부는 사나이 못지않은 연주 실력으로 세상에 유명세를 떨쳤다. 그는 숲의 정령인 마르시아스(Marsyas)다. 그리스 신화에서 마르시아스는 반인반수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복관 피리인 아울로스를 불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피리 연주는 너무나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심지어 현악기의 신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급기야 이 소문은 천상에까지 닿았고 음악의 신 아폴론은 분노하였다.


아폴론은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으로 음악과 시의 신이다. 그래서 그리스 미술에서 아폴론은 대개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현악기의 일종인 리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감히 인간이 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에 자존심이 상한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찾아가서 자신과 연주 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사람들의 칭찬에 한껏 오만해진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드디어 관악기와 현악기의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둘은 실력이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이에 음악의 신 아폴론이 꾀를 내어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하자고 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마르시아스는 깊이 생각지도 않고 덥석 제안에 응해 버렸다. 아뿔싸 현악기와 달리 피리는 거꾸로 들고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 둘의 대결은 싱겁게 끝이 났다. 이 시합의 결과로 마르시아스는 인간의 가죽을 쓰고 신의 흉내를 냈다는 죄명아래 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벌을 받았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장단점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을 상기시키는 이 신화에서 마르시아스가 불던 아울로스는 아폴론이 연주했던 리라와 함께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악기였다.  아울로스는 길이가 같은 두 개의 직선형 관으로 구성되며, 관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형태이다. 아울로스를 연주할 때는 두 개의 관을 동시에 입에 물고 연주하기 때문에 복수형으로 '아울로이(Auloi)'라 부르기도 한다.

아울로스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히브리어로 '할릴'이라고 부르는 관악기를 70인역에는 아울로스로 번역하였다. 한글 성경에서 '피리(저)'로 해석하는 할릴은 '구멍을 뚫다, 상처 입히다, 관통하다'를 뜻하는 '할랄'에서 유래되었다.


이 어원을 알고 있어야 비로소 풀 수 있는 한자가 칼 검劍이다. 왜냐하면, 칼 검자를 구성하고 있는 다 첨僉이 아울로스를 그린 글자이기 때문이다.


다 첨僉의 지금 자형은 모으다를 뜻하는 삼합 집亼, 그 아래 부르짖을 훤吅과 두 사람 인人人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두고 지금까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라는 등의 해석을 해왔지만 이런 류의 해석들은 명백한 오류이다. 아마도 이런 해석이 나온 것은 금문의 형태가 매우 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僉(금문)           전문


다 첨僉의 금문은 얼핏 보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익숙한 글자들이 보인다. 맨 위는 삼합 집亼이다. 삼합 집은 건축물의 기둥 3개가 하나로 합해진 모양으로 '모으다, 합하다'가 원래 뜻이다. 중간 부분은 피리 약龠이다. 그 원래 모습은 갑골문이 간직하고 있다.


                            龠

피리 약龠의 갑골문은 두 개의 피리와 그것을 하나로 묶어놓은 모양을 그린 동그라미로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다 첨僉의 지금 자형에서 부르짖을 훤吅은 원래 복관 피리의 혀(서) 부위를  그린 것이다. 금문에서는 다관 피리를 그렸다.


이제 다시 첨僉의 금문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글자를 살펴보자. 맨 아래 글자는 사람의 코를 그린 스스로 자自이다. 여기서 자는 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콧구멍에서 의미를 끌어낸 '한 쌍'을 뜻한다. 후에 전문에서는 나란할 비比로 바꾸었는데, 나중에 다시 나란할 비人人으로 바뀌면서 지금 자형이 되었다.


정리해 보면, 다 첨僉은 복관 피리인 아울로스를 그린 것으로,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피리가 하나로 합해진 다관악기의 화음(chord)에서 '모두, 다'란 뜻이 나왔다. 화음(和音)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코드(chord)는 'agreement(일치, 동의)'를 의미하는 중세 영어 'cord'에서 유래되었다. 관련된 단어로 strike a chord가 있다. 치다를 뜻하는 'strike'와 화음을 뜻하는 'a chord'의 합성어로, 소리굽쇠 두 개 중의 한쪽을  쳤을 때, 다른 한쪽이 따라서 울리는 공명현상을 가리켰는데, 후에 비유적으로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동조시켜 울리다'란 의미로 발전하여 '심금을 울리다'란 의미로도 쓰인다.


마찬가지로 첨僉은 한 쌍 혹은 여러 개의 피리가 하나로 합해져서 만들어내는 화합과 조화의 의미에서 '모두, 다, 일치하다'라는 뜻이 나왔다. 그러므로 첨僉의 지금 자형에 근거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화음을 만드는 합창의 의미로 보아도 의미상으로는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다 첨僉화할 화龢(和)는 그 자원이 같다.


한편 다 첨僉은 또 그 모양이 휘추리(나무 막대기)를 엮어서 만든 도리깨를 닮아서 '도리깨'란 뜻도 가지고 있다.


관련된 글자를 통해 그 쓰임새를 알아보자.


험할 험險은 계단식 언덕을 뜻한 언덕 부阝자에 '모으다, 합하다'를 뜻하는 다 첨僉을 더해,  언덕들이 즐비하게 모인 험한 산을 뜻했다. 위험(危險), 보험(保險)에 그 뜻이 담겼다.


이 들어간 우리나라의 지명으로 두험천(豆險川)이 있다. 두험천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중랑천의 옛 지명으로, 대동여지도 13첩 4면에도 기록되어 있다. 중랑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의정부를 관통해 그 발원지인 양주 불곡산에 다다른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백화암이 있어 불곡산(佛谷山) 혹은 불국산으로 불리는데, 대동여지도는 '양주의 진산'이라 기록했다. 조선시대 3대 도둑으로 꼽히는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 활동했던 산이라고 하니 예전에는 매우 험했던 산으로 짐작된다.


검소할 검儉은 사람 인에 다 첨을 더하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뜻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檀君)에게 붙이는 호칭인 왕검(王儉)이란 말속에 그 뜻이 담겨있다. 한편 '공동체'란 말속에는 다 첨이 의미하는 '함께 묶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로부터 '금지하다(속박의 의미에서)'란 개념이 나왔으며, 나아가 '검소하다, 부족하다'의 뜻이 파생되었다. 근검절약(勤儉節約)에서의 검儉이 그 뜻으로 쓰였다.


그런가 하면, 거둘 렴斂은 치다, 강제하다를 뜻하는 칠 복에 다 첨을 더하여, 공동체에 강제로 부과하는 세금 또는 모든 것을 강제로 빼앗는 수탈의 의미를 뜻했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욕심을 부려 재물을 빼앗다'를 뜻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그 뜻이 담겼다.


검사할 검은 예전에 관(官)에서 문서들을 묶어서 봉인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첨은 여러 문서 중에서 관련된 문서를 하나로 합하다란 뜻을 나타내며, 목은 문서를 봉인한 후, 검사를 완료했다는 내용을 적은 얇은 나무쪽지를 가리킨다. 오늘날 집문서 등에 검사필이 적힌 도장을 찍는 용도와 같다. 문서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서의 내용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검사(檢査), 검토(檢討), 점검(點檢), 검증(檢證)등의 뜻이 나왔다.


오늘날 국가 기관인 검찰(檢察)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살필 찰察은 신전의 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리는 모습을 그렸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제물에 흠이 없는지, 규례에 어긋남이 없는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로 보면, 검찰(檢察)은 '검사하여 살피는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범죄의 흔적을 조사하고, 증거를 찾아 죄를 입증하는 것이 그 본래 임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검찰은 살펴야 할 범죄 보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고, 조사 중에 알게 된 사실을 봉인하여 두었다가 자신들의 무기로 삼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학생들에게 검찰을 한자로 적게 하면, 검사할 검은 칼 검으로 쓰고, 살필 찰은 뽑을 찰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러다가 검찰의 검檢이 칼 검劍으로 바뀌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라가 화평하기 위해서는 사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檢察이란 한자에 들어있는 피리가 만파식적이 될지, 비극을 부른 마르시아스의 피리가 될지는 검찰 스스로가 세우는 위상에 달려 있다.  


칼 검劍은 문자적 의미로만 보면, 칼의 앞뒤 모두 날이 서 있는 양날 검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첨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피리 구멍에서 추출한 '구멍을 내다, 관통하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를 따르면, 칼 검劍은 사물을 꿰뚫는 검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동굴 은 산기슭厂에 뚫려있는 구멍을, 얼굴 검臉은 사람의 몸에서 구멍들이 모여있는 얼굴을, 눈꺼풀 검瞼은 구멍들이 모여있는 얼굴에서, 눈 부위의 꺼풀을 뜻한다.


한편 벌름거릴 엄噞은 피리를 불 때, 입을 벌름거리는 모습을 뜻하고, 얼굴 울퉁불퉁할 검顩은 피리를 불 때 볼이 튀어나오는 모습에서 나온 의미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음악의 신 아폴론과 연주 대결을 벌인 마르시아스의 피리는 원래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것이었다. 아테나는 메두사의 죽음을 애통하며 우는 고르곤 자매들의 목소리를 모방하여 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테나가 신들의 연회에서 피리를 연주하고 있을 때, 숲 속 요정들이 키득거렸다. 피리를 부는 그녀의 볼이 울퉁 불퉁 흉한 모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자 이를 본 신들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일로 화가  아테나는 피리를 내다 버렸고 우연히 마르시아스가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다 첨僉에는 참 많은 사연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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