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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 Nov 09. 2024

밥솥을 가득 채운 진리

   鼎


그리스 신화에는 망자가 지하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슬픔의 강, 탄식의 강, 불길의 강, 증오의 강, 그리고 망각의 강이다. 그중에 망각의 강을 레테(Lethe)라고 한다. 레테는 망각의 여신이 머무는 강인데, 누구라도 그 강물을 마시면 살아 있을 때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레테는 '망각'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레테(Lethe)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a가 붙으면 그리스어로 '진리'를 뜻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가 된다. 따라서 알레테이아(진리)의 원래의미는 '망각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비은폐' 혹은 '탈은폐'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편 알레테이아는 로마신화에서는 여신 '베리타스'로 등장한다. 베리타스(Veritas)는 라틴어로 진리를 뜻한다. 베리타스는 사투르누스와 비르투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녀를 직접 본 사람은 없다. 그녀는 흰옷을 입고 깊은 우물 속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점을 치는 일이 오라클(oracle)이다. 오라클은 신탁(神託)을 뜻하는 라틴어 oraculum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오라클은, 인간들의 질문에 대한 신의 대답을 가리키는 말이자, 신탁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신전이 아폴론 신전이다. 아폴론 신전은 지중해의 여러 곳에 세워졌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신전이 델포이 신전이다. 고대 세계에서 델포이는 신탁으로 유명했다. 그리스의 수많은 왕과 귀족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신들의 뜻을 묻기 위해 델포이로 모여들었다. 신탁을 받기 위해서는 신분과 상관없이 공물(供物)이나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다.

아폴론신전 국고 창고

델포이에서 신탁을 했던 여사제를 피티아(Pythia)라고 부른다.

피티아가 신탁을 행하던 델포이 신전은 현재 그리스 중부 파르나소스 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구의 중심으로 여긴, 그리스의 도시국가이자 종교적 중심지였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성지가 있었으며, '피톤'이라는 큰 뱀이 지키고 있었다. 아폴론은 이 뱀을 쏘아 죽이고 신전의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피티아를 뽑아 신탁을 내리게 했다.

델포이 신전

현재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유적지는 대부분 파괴되어 기둥 몇 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 기둥들 중에는 나선형으로 감아올린 청동 기둥이 하나 있는데, 이 청동 기둥은 원래 뱀 3마리가 기둥을 감고 있는 모양으로, 세 마리 뱀의 머리 위에는 신탁의 상징인 세발솥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세발 솥 위에 앉아 있는 피티아

이 세발 솥은 피티아가 신탁을 행하는 방에도 놓여 있었다. 피티아는 이 솥 위에 앉아서 신탁을 행했고 그 주위에는 신관들이 둘러 서서 피티아가 하는 말을 받아 적었다. 피티아의 신탁을 통한 예언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설은 가스 흡입으로 인한 환각이다. 피티아가 신탁을 행하는 신전의 지하 바닥 틈에서는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하는데 유황 가스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피티아가 신탁의 도구로 사용했던 이 세발 솥은 갑골문에도 등장한다. 솥 정이란 한자다.

                                   鼎(갑골문)           금문


의 갑골문은 발이 세 개 달린 청동 솥을 그렸다. 이 솥은 단순히 음식물을 조리하는 도구가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제사 때 신탁의 도구로 사용했던 제기이자 국가의 상징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효무본기」를 보면,

"듣건대 옛날에 큰 임금이 영묘한 솥 하나를 만들었는데, 하나란 다스림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많은 사물이 끝을 이어 매는 것으로 천지 만물의 완성을 의미하였다."라고 했다. 또한

 

"황제가 만든 세 개의 솥은 '천, 지, 인'을 뜻하며, 하나라의 우왕은 전국 구주(九州)의 금속을 모아서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하게 하였으며, 이를 소유하는 자는 곧 천자로 여겼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세발 솥이 천지만물의 완성과 건국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발 솥은 가장 안정된 솥이다. 세 개의 발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상징한다. 또한 세 개의 발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인 천지인을 뜻하며, 솥 그 자체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그릇으로서 신권국가의 성립을 뜻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면 "기원전 606년에 초(楚)의 장왕(莊王)은 주나라 국경 지역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이에 주나라의 정왕(定王)이 왕손만을 보내 장왕의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이때 초의 장왕이 왕손만에게 천자가 가지고 있는 솥(鼎)의 크기를 물었다. 왕손만이 대답하기를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비록 솥이 작더라도 무거워 옮길 수 없고, 덕이 사악하고 어둡다면 비록 솥이 크더라도 가벼워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퇴했지만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기에 아직 솥의 무게를 물을 때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정이 국가와 왕권을 상징했음을 잘 보여준다. 삼황오제의 뒤를 이은 하나라의 제1대 우왕(禹王)이 만든 구정(九鼎)은 훗날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물리친 상나라의 탕왕(湯王)이 차지했고, 다시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빼앗아 주나라 건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정鼎의 상징성은 관련된 글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갖출 구에 대해서 살펴보자.

갖출 구具의 금문은 두 손으로 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모두 갖추다, 구비하다, 온전하다'를 뜻한다. 옛사람들은 '이사 가는 것'을 '솥단지를 뗀다'라고 했다.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할 때에도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솥을 거는 일이었다. 설령 살림살이 전체를 옮겨 가지 않아도 부엌에 솥을 걸면 이사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한국민속 대백과사전> 참조


한편 구가 제사용 솥이라면, 제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는 뜻이며, 솥을 들고 있는 사람은 신관을 뜻한다.


고대의 문자들은 동서양을 가로질러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갖출 구具는 히브리어 '콜'과 상통한다. '콜'은

와 매한가지로 제사용 '솥'이나 '기물' 등이 완전히 갖추어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단어와 한 뿌리에서 나온 코헨은 제단에서 번제를 올리는 일을 맡은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신권국가였던 고대 중국의 상나라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나 왕실의 일에 대해서 점을 칠 때, 솥을 가운데 두고 점을 쳤다. 인원 원이 그 모습을 그렸다.

갑골문은 위로부터 '동그라미'를 뜻하는 구와 그 아래 세발 솥을 그린 정으로 구성되었다. 델포이의 신탁에서 여사제인 피티아는 이 솥 위에 앉아서 신탁을 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피티아가 받은 신탁 내용을 기록하는 관원들이 자리하였다.


관원 원員은 신탁을 상징하는 세발 솥 주위를 둘러선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이 사람들은 점친 내용을 갑골에 기록했던 신관들을 말한다. 관원(官員), 공무원(公務員), 직원(職員) 등에 그 뜻이 담겼다.

                          貞

은 금문에 이르러 원래의 형태가 많이 변형되었다. 금문은 점 복과 조개 패가 합해진 형태이다. 여기서 패솥 정鼎이 잘 못 변형된 것이다. 복은 점을 칠 때, 불에 달군 쇠꼬챙이에 의해 거북의 껍질이 터지면서 금이 간 모양을 그렸다. 이때 점을 친 사람(貞人)은 금이 간 형태를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따라서 곧을 정貞은 신탁을 상징하는 솥을 앞에 두고 점을 치는 모습이며, 점을 칠 때는 순수하고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에서 '마음이 곧다, 바르다'란 뜻이 나왔다. 혹자는 거북 점의 갈라 터진 모양이 곧게 뻗어 나가는 모양에서 그 의미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정의 변형이 참 진眞이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眞

[설문해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진은 신선이 모습을 변화시켜 승천하는 것을 말한다. 변할 화, 눈 목, 숨을 은, 여덟 팔로 구성되었으며, 은 신선이 승천할 때 올라타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허신이 UFO를 본 것일까, 아니면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로 오르내리는 사닥다리를 본 것일까?

금문의 형태를 보면, 허신의 설명과 어떠한 개연성도 찾을 수 없다. 아마 허신의 설명은, 전국시대 말부터 유행한 신선사상과 연계시키려는, 무리한 시도에서 비롯된 해석으로 보인다.


허신이 말한 신선을 다른 말로 진인(眞人)이라 부른다. 진인의 기원은 연금술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연금술은 주술적 성격을 띤 일종의 과학과 철학을 말하는데, 그 시작은 구리를 황금으로 바꾸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물질적 변화를 인간에게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신선사상의 출발이며, 그 도(道)의 궁극에 이른 사람을 진인이라 했다.


참 진眞의 원래의미는 '가득 채움'이다. 글자의 구성은 숟가락 시의 처음 형태인 비와 솥 정으로 구성되었다. 제사용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 국자로 솥에 물을 채우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진의 처음 의미는 '가득 채우다'이다.


과 대응하는 단어가 히브리어 '말레'이다. 말레는 '가득 채우다, 메우다, 헌신하다'를 뜻한다. 원래는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는 의미였는데, 시간적인 채움의 의미로 확대되어, 시작된 일을 완성하거나, 말한 일의 성취를 뜻하게 되었다. 그 용례를 보면, 공간적인 채움의 의미로는 텅 빈 그릇이 가득 찰 때까지 기름을 쏟아붓는 일 등을 뜻하며, 시간적인 채움으로는 임신 기간의 만료와 같이, 어떤 기간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또 비유적인 의미로 희생제물을 '손에 가득 채우다'라는 말은 제사장을 임명하는 것, 임기를 채우는 동안 제사장 직에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보듯이 진은 빈 솥에 물을 가득 채우듯이,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의미에서 '완성과 성취'를 뜻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모자람이 없는 완성 즉, 온전하고 완전함에서 '참, 진리'라는 뜻이 나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진리의 여신인 베리타스가 깊은 우물 속에 숨어 있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부족하고 부정한 인간은 완전한 존재인 신성에 쉽게 다가설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리는 빛과 같은 것으로, 일리테이아(탈 은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베리타스(진실)는 늘, 시간의 신이자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기고 질투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항상 진실의 편이다.  미래가 될지라도...


한편 진실(眞實)을 직역하면, 참 열매란 뜻이 된다.

                               實

열매 실의 금문은 신전곳간에 진귀한 재화가득 찬 모양으로 원뜻은 '충만' 혹은 '풍족'다. 아마 델포이 신전의 국고가 이랬을 것이다.


 중국 구주(九州)의 제후들이 바친 공물이다. 조세를 바칠 때는 속이지 않고 규정에 따라 사실대로 이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행하다, 책임을 다하다, 적용하다, 참되다'등의 뜻이 나왔다. 사실(事實), 진실(眞實), 실행(實行), 실천(實踐), 성실(誠實)등이 모두 그 뜻으로 쓰였다. 또한 국고가 풍족하게 채워진 모양에서 '이르다, 도달하다(實現)'라는 뜻이 나왔으며, 그 내용이 실한 모양에서 '속, 튼튼하다(充實)'라는 뜻이 나왔다. 한편 이 재물들은 농사를 짓는 일등 어떤 행위나 행실(行實)의 결과물이므로 비유적으로 '열매'를 뜻하게 되었다. 실과(實果), 결실(結實)등이 그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진실(眞實)은 일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하는 진과, 그 일의 결과가 만족하게 이루어짐을 뜻하는 실합해진 말이다. 달리 말하면 진眞은  영적인 밥솥을 채우는 것이고 실實은 금고를 채우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실은   열매 맺는 것이다. 이로부터 말의 참 열매(거짓이나 왜곡, 은폐 등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밝힌 진술)를 의미하는 '진실'이란 뜻이 나왔다.


이제 관련된 글자들을 살펴보자.

삼갈 신愼은 제사를 지낼 때, 몸과 마음을 삼가며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즉, 정성을 들이는 일을 뜻한다. 

신중(愼重), 근신(謹愼)등에 그 뜻이 담겼다.


진압할 진鎭은 제사용 제물이 가득 채워진 청동 솥의 무게에 바닥이 눌리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적으로 '진압하다, 진정시키다'를 뜻한다.


진압할 진鎭이 솥의 무게를 의미로 삼았다면, 정수리 전顚은 솥의 형태를 뜻으로 삼았다. 진은 위가 열리고(숨구멍) 배가 부른 솥모양(둥근 머리) 닮은 사람의 머리와 그 꼭대기의 정수리를 뜻했다. 한편 정수리 전은 주객전도(主客顚倒)에서와 같이 '넘어지다, 거꾸로 되다'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전후좌우 사방으로 잘 흔들리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의미이다. 머리가 거꾸로 됨을 의미하는 기울어질 경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한편 미칠 전癲은 병이 정수리까지 올라가서 머리를 흔들며 경련을 일으키는 병(광증, 간질)을 뜻하고, 산의 정수리산꼭대기 전巓이라 한다.


메울 전塡은 흙으로 빈 곳을 채운다는 뜻에서 '메우다, 채우다, 박아 넣다'등의 뜻이 나왔다. 총알을 '장전하다'라고 할 때의 장전(裝塡)에 그 뜻이 담겼다.



                <진실을 구하는 시간>

프랑수아 르무안/Francois Lemoyne

      그림출처:hrrp;//www.photo.rmn.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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