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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Jun 15. 2024

공손하게 욕하는 교사, 보셨나요?

상담하다 학생 아버지께 육두문자를 남발한 이야기



궁합이라는 것


    아마 대부분의 교사는 공감할 이야기, 학생과 교사 사이에도 궁합은 존재한다.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내가 혼자서 '교사-학생 궁합론'이라고 이름 붙인 이론. (※주의: 나만 아는 이론일 수도 있다.) 편견에 치우친 교사라는 편견은 싫지만, 개인적으로 '교사-학생 궁합론'의 신뢰도는 55%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시윤이(물론 가명이다.)와 나의 궁합은 꽉 찬 100%이다. 그 운명적인 시작은 시윤이와 나의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 학교로 근무지를 옮겨 맡게 되었던 3학년 교실이 배경이다. 그 해 3학년은 소위 '경합 학년'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나는 전입 교사인 주제에 3학년을 맡게 되었다.(이런 천운이!) 내가 맡게 될 3학년 아이들이 그림과 같이 착하고 예쁘다는, 그리하여 학급 배정 결과 봉투를 열어 볼 필요도 없다는 부장님의 귀띔은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시업식과 함께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3월 2일. 야심 차게 준비한 첫 만남 활동에서부터 시윤이는 큰 존재감을 뽐냈다. 깎아 놓은 밤톨처럼 생긴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에 짙은 쌍꺼풀이 인상 깊은 눈. 그리고 두 눈에 가득 서린 반항기(네가 왜 거기서 나와?)...! 교사도, 학생도 긴장해 마지않는 3월 2일. 정말 그림과 같이 착하고 온순한 아이들이 가득한 교실에서 시윤이는 홀로 '6학년 엉아'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에는 무조건 부정적인 답을 하라는 지령이라도 받은 듯, 삐딱하기만 하던 시윤이. 아이들이 하교한 빈 교실에서 내 머릿속을 온통 지배한 것은 시윤이었다. 이제 겨우 첫날을 지냈을 뿐이니, 색안경을 끼고 아이를 대하는 교사는 되지 말자고 얼마나 다짐을 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참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런데 왜 100%?


    나는 왜 시윤이와의 궁합을 100%라고 단정했을까? 한 사람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시윤이의 성격을 표현하는 낱말은 단연 '시니컬'일 것이다. 시윤이의 대답은 일관되게 부정적이었고, 시윤이 근처엔 늘 무어라 꼭 집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반항기가 넘쳐흘렀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시윤이와 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생겼다. 어느 날은 친구 문제, 어느 날은 하교 후에 일어난 문제, 또 어느 날은 심한 장난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


    하지만 시윤이의 단점을 상쇄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솔직함'이었다. 시윤이는 쉽게 실수했지만, 그만큼 쉽게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담아 사과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시윤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나는 시윤이에게 '시며 들고' 있었다. 시윤이의 최대 무기가 '솔직함'일뿐, 시윤이가 가진 장점은 참 많았다. 진솔함, 공감 능력, 순수함과 따뜻함. 유머감각과 장난기, 글로는 미처 다 표현하기 어려운 모습들.


    시윤이를 진급시킨 이듬해 3월 2일, 시윤이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께서는 매우 난처한 얼굴로 우리 교실을 찾아와 시윤이는 어떤 아이냐고 물으셨다. 그에 나는 무어라고 대답을 했던가? '교사-학생 궁합론'을 떠올려 본다. 아마도 시윤이를 만나는 대부분 선생님들은 시윤이와의 궁합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 시윤이와의 첫 만남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어쩌면, 시윤이의 그 시니컬한 태도는 말랑말랑하고 여리디 여린 속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였을까?


오해와 욕설


    사건은 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발생한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우리 반 아이들과 팀플(!)이 필요한 온라인 게임을 하던 도중, 인터넷 접속 문제로 인해 게임 진행 상황을 오해한 시윤이가 채팅창에 육두문자를 남발한 것.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시윤이의 채팅 내용은 말 그대로 육두문자여서, 시윤이를 확실히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윤이는 사건의 심각성을 이미 충분히 느껴 반성하면서도,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아직 갈무리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나와 마주했다.


    나는 시윤이에게,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온라인상에서도 절대로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시윤이가 사용한 욕설의 수준이 너무 높아(?)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친구들의 이야기와 시윤이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해로 인한 상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에 순간적인 감정을 '욕설'과 같이 나쁜 방법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는 훈계도 더했다. 시윤이는 이번에도 본인의 장점을 십분 발휘해 친구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그런 심한 욕설은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민이 되는 것은 다음 단계였다. 이제 겨우 3학년 학생인 시윤이가 했다고 믿기지 않는 욕설의 수준. 가정 연계를 통한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시윤이의 부모님께 연락을 취했다. 시윤이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첫인사와 함께 시윤이가 3학년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연 후, 게임 사건을 전달했다. 학교에서의 지도를 통해 시윤이가 충분한 반성과 사과를 하고 갔으며, 친구들과도 오해를 풀어 문제는 잘 해결했다는 이야기. 3학년 아이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실수이기에, 추가적인 훈육보다는 욕설을 어디서 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확인과 재발 방지 부분만 협조해 주십사 목적을 전했다.


아니, 선생님 그러니까 도대체 무어라고 욕을 했느냐고요?


    전화 상담 내내 '아이고...', '에휴...', '죄송합니다.'와 같은 반응과 함께 내 이야기를 듣던 시윤이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애가 도대체 무어라고 욕을 했다고요?"

이에 나는 시윤이가 사용한 것이 육두문자 수준의 심한 욕설이어서, 욕설을 접하게 된 경로 등이 우려가 된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했다.

  "아니, 선생님 그러니까 도대체 무어라고 욕을 했느냐고요?"

시윤이 아버지가 궁금했던 것은 시윤이가 사용한 구체적인 욕설 내용이었던 것이다. '육두문자 수준의 심한 욕설'이라는 묘사는 시윤이 아버지께 충분한 답변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윤이가 사용한 욕설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전화에 대고 학부모님께 직접 구사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아버지가 궁금해하시는 것이 정말 '시윤이가 사용한 구체적인 욕설 그 자체'인지 물었다.


  "아이가 무슨 욕을 썼는지를 알아야 그 욕을 어디서 들었는지 추측이라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시윤이 아버지는 어떤 분이실까? 욕설의 내용이 정말 궁금하신 걸까? 아니면 혹시 의사소통에 오류가 있었나? 머릿속을 떠다니던 질문 구름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공손하지만 설득력 있는 목소리. 시윤이를 지도하기 위해 욕설의 내용을 참고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대답에 나는 시윤이가 구사한(!) 욕설을 소리 내어 전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버지. 그게, 그러니까요. 시윤이가, 야. 이. 개. 나. 리. 같. 은. 참. 새. 들. 아! 이. 쓰. 레. 빠. 같. 은. 강. 아. 지. 들. 아! 내. 가. 너. 희. 간. 나. 들. 이. 랑. 다. 시. 는. 낯. 짝. 도. 마. 주. 하. 지. 않. 는. 다! 수. 수. 꼭. 다. 리. 같. 은. 놈. 들! 나. 가. 서. 내. 눈. 앞. 에. 서. 모. 두. 사. 라. 져. 버. 려. 라!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욕설을 발음함에 있어 어떠한 억양이나 소리의 높낮이도 담지 않고 최대한 문절을 끊어서 읽는 것이었다. 내 입에서 시작된 발음들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건조한 사실'로만 아버지께 전달되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한 대 패 주지, 그냥 두셨어요?


    구체적인 욕설 내용을 들은 시윤이 아버지의 한숨은 더욱 깊어지고, 나는 더욱 좌불안석이 되었다. 어른들이 욕을 하듯 아이도 당연히 욕을 할 수 있지만, 심한 욕설은 교우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기회를 봐서 지도해 달란 마무리 멘트로 상담을 마치려던 때였다.


  "선생님, 시윤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그놈의 자식을 아주 그냥 한 대 패 주지, 그냥 두셨어요?"

 구체적인 욕설 내용을 알려달란 난도 높은 미션을 이제 막 수행한 참인데, 더한 역경이 또 있나. 아, 나는 시윤 아버지에게 전화를 괜히 한 것인가.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스쳤다. 이어질 말을 열심히 찾고 있는데, 다행히 시윤이 아버지가 먼저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말입니다, 선생님. 저희 클 때에는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해서 학교 선생님 말씀을 또 얼마나 잘 들었습니까? 생각해 보면 부모님보다 선생님 말씀이 더 무서웠습니다. 근데 제가 보니 요즘 아이들은 영 그런 것도 없고, 사실 저나 시윤이 엄마나 일한다고 바빠서 교육에 큰 신경도 못 쓰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시윤이가 또 그런 잘못을 한다면 두들겨 패셔도 좋으니, 반드시 무섭고 엄하게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안도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대면으로 인사를 하지도 못한 채 전화에 기대 상담하며 여러 번 긴장했던 마음이 편해지자 여유가 생겼다. 왠지 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고, 나는 아버지께 시윤이가 가진 많은 장점들과 시윤이와 나 사이에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몇 가지 전했다. 그리고 요즘 학교에서는 절대로 체벌을 할 수 없지만, 아버지께서 시윤이를 위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으니 더욱 잘 지도하겠다는 말씀으로 상담을 마무리했다.


인생에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것


    시윤이는 3학년에서의 생활을 잘 마쳤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우리 교실 근처를 지날 때면 잊지 않고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시윤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내가 수업 중이라 자신을 못 볼 지라도 시윤이는 절대 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또 어느 여름엔가, 자기를 닮아 깎아놓은 듯 예쁜 자두를 가져왔던 시윤이의 얼굴도 떠올려본다. 얼마나 들고 있었던 걸까? 시윤이가 몰래 내민 자두는 시윤이의 손 안에서 데워져 따뜻한 상태였다. 나는 그 자두를 계속 아끼다가 결국 먹지 못했다.


    시윤이와 쌓은 아름다운 추억이 이토록 많건만, '시윤이' 하면 나는 반사적으로 시윤 아버지와 상담했던 경험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경험이지만 내게도 깨달음의 순간이었기에, 나는 일화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무서운 사람'의 존재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시험을 망쳤을 때 화를 낼 엄마의 얼굴. 해서는 안 될 잘못을 했을 때 떠오르는 아빠의 얼굴. 어쩌면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두려울 수도 있는 '무서운 사람'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용기'를 불러일으키거나, 용기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시윤이에게 물었더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아빠란다. 시윤이는 그런 '무서운 아빠'를 둔 덕분에 아마도 잘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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