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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Jul 22. 2024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졸업식

근데 우는 사람은 담임교사 한 명



어떤 첫사랑 이야기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처음'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의 첫 만남, 첫 이별의 기억, 합격의 첫 기억 등과 같이 모든 '처음'은 그 자체로 강렬하다. 처음은 왜 그렇게 힘이 셀까? 나의 경우를 돌아보면 '처음'은 늘 '서툶'과 함께였다. 어쩌면 서툴고, 낯설고, 어려운 경험이 한데 모여 더욱 강렬해지는 까? 처음과 관련한 여러 기억이 있지만 그중 가장 소중한 기억은 '첫 담임을 맡아 좌충우돌했던 해의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기기도, 슬프기도, 아찔하기도 한 경험 대부분은 그 해에 겪었다.


    '교직의 기쁨과 슬픔'에서도 잠깐 묘사한 적 있는데, 그때 나는 '내가 뭐라고 누굴 가르치나?' 하는 질문과 '교사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걸까?' 하는 질문 사이에서 한창 혼란을 겪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 막 이십 대 초반을 지난 '어른이'가 누굴 가르친다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잘 모르면서 너무 노력하면 탈이 난다." 나의 교직 첫 해를 요약하는 문장이다. 한창 거칠고 생활지도가 어렵기로 소문난 학년에, 그 학년에서도 유명했던 학생('폭주기관차도 멈추게 하는 것'의 주인공)까지 맡아 그 부담감과 어려움을 어찌할 바 몰랐다. 이미 지난해에 전담 교사로 나를 만나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아이들을, 담임이 되어 다시 만나는 건 큰 부담이었다. 너무도 막막했던 나머지 나는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게 된다.(지금 생각하면 다소 웃기고 어이없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했다.) 그리고 새 학년의 시작을 알리는 3월 2일, '절대 웃지 않기'라는 나의 목표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그 아이들이 내게 이토록 진한 첫사랑의 기억을 남길 줄 모르고,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을 너무나 야박하고 비루하게 열었던 것을 아직도 반성한다.


빨리 나이 먹고 싶다!


    수능도, 임용도 재수 없이(?!) 한 방에 통과했기에, 나는 겨우 24살의 나이에 발령을 받아 학교에 출근을 시작했다. 세상에 '젊음'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눈에 띄게 젊은 교사인 나를 그 자체로 좋아하고, 쉬이 따랐다. 젊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엄청난 특권이다. 특히 아이들이 나를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끼고,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묻지 않아도 내게 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일을 떠들어 대는 아이들 덕분에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교사'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젊은 나'를 편안하게 느끼면서 동시에 종종 선을 넘었다. 나를 선생님이 아닌 가까운 사촌 언니 또는 옆집 누나로 여기는 듯, 교사 입장에서 허용하기 어려운 여러 행동을 보였다. 수업 시간에 한 번이면 족할 농담을 끝없이 이어간다든지, 내가 다툼을 중재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말다툼을 이어나가는 식의 행동들. 이제 나는 '교사의 권위'는 내가 세운다고 서는 게 아니란 사실쯤은 아는 중견 교사(!)가 되었지만, 그때의 내게 아이들의 그러한 행동들은 나의 권위에 대한 큰 도전이었다.


    학부모들의 시선도 비슷했다. 아이들이 한창 사춘기에 접어드는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젊어서 좋다는 긍정 평가와 경력이 없어 학급을 잘 운영할지 다소 우려스럽다는 부정 평가 사이에서 나는 참 혼란스러웠다. 어느 상담 중, '선생님이 아직 젊고, 아이를 길러 보지 않으셔서'라며 말끝을 흐리는 학부모를 대면했던 날. 나는 '빛나는 젊음'의 뒷면을 마주한다.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나 역시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그 상황을 넘겼다. 학부모님이 나쁜 의도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공격을 받은 느낌에 여러 날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녀를 길러보지 않은 교사는 교사의 자격이 없는 것인가?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자녀가 없다면, 나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교사가 되는 것인가? 억울한 마음으로 몇 날을 '교사의 자격'에 대해 고민을 하고, 나름의 원인(?)을 찾는다. 문제는 교육부! 이럴 거면 교육부는 아예 결혼하고 육아 경험이 있는 사람만 교사를 시키지. 차라리 '결혼 여부', '자녀 유무'를 조사해서 임용 시험을 볼 자격을 부여하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교대에서부터 현장에 나가면 이런 일도 겪을 수 있다고 알려줬어야지! 불똥은 다시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나는 '어쨌건 빨리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나이가 많아 보이면 그런 말은 듣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좌충우돌, 엉망진창 교실 이야기


    '이 바닥에선 나이 많은 게 최고다!'라는 결론을 내린 후 가만 살펴보니, 과연 나이 많은 선생님들의 교실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등교하자마자 서로 이야기하고 장난치느라 시장통이 따로 없는 우리 반과는 달리, 옆 반은 차분히 아침 독서를 하며 그림같이 앉아있었다. 체육, 과학 등 이동 수업이 있을 때는 또 어떤가? 줄을 서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리는 우리 반과는 다르게 또 다른 옆 반은 회장의 인솔에 질서 정연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반. 나는 그게 '나이'가 아닌 '경력'에서 오는 바이브라는 걸 모르고, '젊은 선생그럼 그렇지.' 하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결심을 한다. 부러 더 엄격하고 깐깐한, 아이들이 학을 뗄 정도로 꼬장꼬장한 선생님이 되기로. 아직 4월, 학기 초였기에 다행히 아직 이미지 쇄신의 가능성은 있었다.


    우선 학급 규칙을 다시 만들었다. TV 화면에 한글 화면켜 두고 아이들과 함께 우리 반의 단점을 찾고, 그러한 모습들로부터 지켜야 규칙을 도출했다. 아이들은 보기만 했을 뿐, 사실 규칙은 내가 만든 것과 다름없었다. 아침 시간, 수업 시간, 점심시간, 종례 시간 등 학교에서의 시간을 촘촘히 구분해 밀도 있게 규칙을 세웠다. A4 용지 두 바닥이 빼곡히 찼다. (벌써 숨 막힌다.)


    뿐만 아니라 규칙을 어긴 아이들은 무조건 하교 후에 남아서 '자기 성찰문' 쓰게 했다. '자기 성찰문'이란 말도 내가 만든 것이었는데, '제가 이러이러한 행동을 한 것을 반성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와 같이 정해진 형식의 '반성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규칙을 어긴 까닭과 그런 상황에 대한 성찰, 앞으로 학교 생활에 대한 깊은 다짐이 더욱 잘 드러나는 글을 쓰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엄격한 규칙이 있으면, 아이들을 더욱 잘 지도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규칙을 진정으로 잘 지키려 노력하며 성장할까? 답은 명백한 '아니오.'다. 하지만 나는 그걸 몰랐다. 빼곡한 규칙 때문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이들이 거의 매일 생겼다. 아이들이 작성한 '자기 성찰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만 갔다. 안 그래도 덜렁대고 매일 깜빡하는 나의 '본캐'는 본성을 거스르고 깐깐한 선생님인 척하는 '부캐' 때문에 힘든 매일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나 때문에 아이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


    깨달음은 서서히 왔다. 아이들은 '자기 성찰문'이 쓰기 싫어 몸을 배배 꼬면서도, 잠깐의 즐거움 혹은 편안함을 위해 일부러 규칙을 더 어겼다. 덕분에 내가 세운 학급 규칙은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한 술 더 떠서 '자기 성찰문'을 쉽게, 잘 쓰는 방법을 저들끼리 공유했다. 우리 반은 넉살과 임기응변에 더해 나날이 글 솜씨만 늘고 있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다. 어쩌면 아이들도 내가 깐깐한 선생님이 될 수 없단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아이들의 예상치 못한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나는 깐깐한 선생님 되기를 그만두었다.


     꼼꼼함과 깐깐함은 물론 교사에게 필요한 미덕이지만, 늘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내 본모습을 보이고, 내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더 따뜻하고 활기찬 교실을 만들 수도 있었다. '내려놓음'은 나와 우리 교실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담임의 젊음과 서툶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반되는 짝이라는 걸, 나보다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를 깊이 배려하고,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 내려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아이들을 통해 비로소 교직에 마음을 붙이게도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교직의 기쁨과 슬픔'에 언급한 적 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선택지는 내게 없었다. 우리 반은 이전의 활기와 밝은 에너지에 더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동료애와 끈끈함으로 한 데 뭉쳐, 누구나 부러워하는 반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교 후에도 집에 가지 않고, 어떻게든 학교에 남아 저들끼리 놀고 업무를 해야 하는 나를 방해하며(!) 6학년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내가 자기들을 사랑한단 걸 너무 잘 알아 매일 '선생님, 저희 같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착한 학생들 다시는 만나실 걸요?' 하며 으스댔고, 그에 나는 '너희보다 나은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대꾸했다. 하지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다시는 날 것의 나를 보이고, 이토록 진한 애정을 쏟아붓고, 이렇게나 좌충우돌할 일은 없겠다는 것을. 이런 '처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교사만 우는 졸업식


    학교에서의 시간은 늘 빠르게 흐른다. 나와 아이들이 매일 지지고 볶으며, 애틋해져 가는 사이 졸업식이 다가왔다. 졸업식을 앞둔 시점에서부터 나는 싱숭생숭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 서로 눈빛만 봐도 있는 사이가 됐는데, 벌써 졸업이라니! 왠지 내가 열심히 품어 기른 알둥지를 통째로 빼앗기는 기분에 억울하기만 했다.


    이별을 마주하는 자세는 그 사람이 관계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에 따라 다르다. 덜 사랑한 사람이 더 길게 후회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졸업식 아침, 울지 말자고 밤새 마음을 다잡고 출근해 놓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물을 터뜨렸다. 아이들도 나를 따라 그렁그렁. 중학교에 가기 싫다고, 선생님이 중학교 선생님으로 올 수는 없냐고 물으며 우는 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은 마지막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 역시 실패하고, 결국 나는 아이들과 서로 마주 보거나 껴안고 울기만 하다 졸업식장으로 내려갔다.


    모든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모인 기쁜 자리. 아이들의 성장을 마음껏 축하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건만, 연단 위에 올라선 후에도 나는 내내 울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무지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특히 아이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물이 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아이들에게 서툴고 부족했던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였다. 사랑을 할 땐 조건 없이,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단 말의 진정한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내 눈물의 정체는 아이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저들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쓴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선생님, 이제 그만 우세요.' 하는 얼굴로 안타까운 눈빛과 위로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심지어 몇몇은 마치 떼쓰는 아기를 달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런 식의 배려가 나를 더 울게 한다는 것도 모르고. 눈물 콧물 다 빼며 계속 우는 선생님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결국 나는 울던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눈물조차 그치게 만들고, 장장 3시간에 달하는 졸업식 내내 우는 대기록을 세웠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찬란한


    이제껏 서술한 내용은 내겐 숨기고 싶은 과거이다. 어떤 면에서는 상처이기도 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개하는 까닭은 이런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고작 24살, 어렸기에 더욱 무모했던 나를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아이들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지나고, 한 해 한 해 경력을 쌓을수록 나는 더욱 노련한 교사가 되어 더 어려운 상황에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첫사랑'과 같은 느낌은 다시는 내게 오지 않았다. 매 년 새로 만나는 아이들에게 첫 해 아이들에게 쏟았던 만큼의 노력을 쏟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한 편으론 기쁘기도, 또 한 편으론 슬프기도 한 일이다.



    그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고 맞이한  겨울,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술을 사달라며 나를 찾는 연락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던 그날. 몰라보게 커 버린 아이들을 만나 뒤늦게 사과할 기회를 얻었다. 내가 너무 부족했다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맥주잔을 앞에 두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이들이 대답한다. "저희는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라 너무 좋았는데요? 6학년 때만큼 학교가 좋았던 적이 없어요." 이놈들, 역시 나와 지내며 넉살과 임기응변만 늘었던 게 맞구나. 슬쩍 미소가 피어오른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밤이 시간 깊은 줄 모르고 흘러만 다. 함께 모여 옛날이야기를 하는 게 이토록 재미있을 일인가? 내게 벌써 이렇게나 커 버린 제자들이 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이자 큰 위안인지. 앞으로 쌓여갈 나의 경력이 기대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글을 빌어 사랑스러운 나의 제자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응원과 깊은 애정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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