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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Jul 05. 2024

교직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작가 「일의 기쁨과 슬픔」 오마쥬와 교직에 관한 짧은 단상



어쩌다, 교사


    나의 일을 사랑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말랑말랑한 그래서 변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이 직업이 좋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매 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그들의 성장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 큰 행운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워낙 여기저기 마음을 잘 빼앗기는 성향 탓에, 나는 우리 반을 거쳐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도 이내 마음을 빼앗기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교사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생김새와 의미가 각자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교사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교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편견이 싫었다. 여자 직업으로는 딱이라는 말이(나는 딸만 있는 집의 장녀이다.), 아이를 낳아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말이(고작 고등학교 3학년인 나는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이르기에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말이(어릴 때는 남는 게 시간이기에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싫었다. 그 직업의 본질보다, 수반되는 직업적 특성이 강조되는 것이 싫었다. 돌아보니 나 역시도 교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편견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 번도 교사를 꿈꾼 적은 없다.


    어쩌다 교사를 하게 되었을까? 부모님의 강력한 권유와 예상보다 낮은 수능성적, 그리고 정시 지원 결과의 우스운 합작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이제 와 밝히지만 교대에 다니는 4년 동안, 내가 '교대생'이라는 사실은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전문적인 학과 지식을 배우는(뭔가 그래 보이는) 일반대생들이 미치도록 부러웠고, 지망했던 학교들에 비하면 턱없이 좁은 캠퍼스가 미치도록 싫었다. 좁은 우물을 벗어날 용기도 없이 그저 우물만 탓했다. 교직 생활에 이렇게 잘 적응할 줄 알았더라면, 대학 생활을 조금 더 열심히 해 보는 건데.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나... 판사였나?


    더한 고백을 더하자면, 교사가 된 후에도 오래간 이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조금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던 해의 어느 쉬는 시간에 두 아이가 서로 싸웠다며 나를 찾아왔다. 내 머릿속을 채운 건 커다란 물음표들이었다. 둘이 싸웠는데 왜 나를 찾아왔지?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설마 저 두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줘야 하나? 근데 그건 판사가 하는 일 아닌가? 나는 많은 물음표들 사이에서 입 밖으로 낼 만 한 문장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아이들은 '그냥 저희끼리 알아서 해결해 볼게요.' 하는 표정으로 내 곁을 떠나 주었다(!). 6학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기억은 아직도 내게 조금은 아찔하고, 조금은 웃기기도 한 초보 시절의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바로 내 일의 '정체성'이었다. 분명 '교사'라 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건만(또한 교대에서 4년 내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 배웠건만), 막상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뿐이 아니었다. 처음 '공문'을 써야 했던 날 느꼈던 막막함은 그 얼마나 깊었었나. 첫 학부모총회는 나를 얼마나 긴장케 했었나. 교육의 수준을 넘어서 막무가내로 억지 부리는 아이를 대할 때 느꼈던 그 무력감이란.


    교육대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배웠던 교과 지식과 교육학은 현장에서 그 쓰임이 크지 않았다. 당장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대개 옆 반 선생님이 알고 있는 지식이거나, 때로는 내겐 없는 별 것 아닌 학습 자료였다. 심지어 그 별 것 아닌 자료가 수업에 큰 역할을 할 때면, 왠지 모를 허탈감이 찾아왔다. 교육대학교가 정말 교원을 전문으로 양성하는 특수목적대학교가 맞는 것일까? 대학 4년을 잃어버린 것 같은 억울함에 더해 나의 '교사하기 싫음' 증세는 현장에 나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내가 속한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 교직문화, 아이들과 학부모의 성향 등 형편(?)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나의 학교 생활이 싫었다. 교사로서의 전문성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도대체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사랑하게 되었나? 마음 빼앗기기를 특기로 하는 내게 학교는 나가기 싫은 일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겐 조금 다른 느낌이 있었다. 작은 몸으로 나름의 생활을 해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생각해 보면,  '아, 그래도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라고 확실하게 깨달았던 순간이 있다. 아이들로 인한 순간이었다.


스며듦, 그 속절없음에 관하여


    담임을 맡은 첫 해 겨울의 일이다. 경력도 없고, 요령도 없고, 아프단 이유로 병가를 낼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에 심한 감기로 죽을 것 같이 아팠던 그날도 학교에 출근했다. 문제는 수업이었다. 어찌어찌 출근은 했지만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몸 상태가 아니어서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술, 독서 활동 등으로 시간표를 변경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했던가. 전담 선생님의 과학 수업 2시간이 있는 날이란 사실이 새삼 감사하기만 했다.


    겨우겨우 1, 2교시를 마치고, 든든한 학급 회장에게 과학실로 학생 인솔을 부탁한 후 나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아마도 약 기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신없이 잠을 자는데, 멀리서 희미하게 아이들이 과학 수업을 마치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는 일어나야지, 생각을 하는데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런 몸 상태로 출근을 괜히 했구나, 어차피 수업도 제대로 못 하는데. 후회하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려던 순간이었다.


    교실 앞 문이 열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말소리 뒤로 "쉿! 조용히 해!"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선생님 오늘 아프다고 하셨잖아. 지금 아파서 주무시는 것 같으니까 우리 조용히 하자."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히 교실에 들어왔다. 평소 우리 반은 절대 조용한 반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함과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나를 진정으로 위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배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베풀고, 인내하는 것은 나만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돌아보니 내가 몰랐을 뿐, 아이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내게 많은 것을 베풀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이 교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날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정말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몰랐던 그 시절에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 여유가 생긴 지금도 변치 않는 내 직업의 특성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아이들과 살을 맞대고 생활한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은 내겐 아이들을 정의하는 명제같이 느껴진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줘야 하고, 때로는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처럼 굴고, 때로는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는 아이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다. 그래서 힘들고, 화가 나다가도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아이와 사랑에 빠져버린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아이들에게 속절없이 스며들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육대학교에 입학하던 시절만 해도(라떼는 말이야), 교대에 입학하길 희망하는 지원자가 꽤 많았다. 교대는 입학컷도 높은 편이었고, 경쟁률도 치열했다. '교사'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성공해 교대에 들어온 친구들도 꽤 많았다. 그런 친구들은 뼛속까지 '선생님' 같아 어쩌다 교대에 흘러들어온 나는 자주 기가 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교권 침해'의 다양한 사례를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교대에 입학한 후, 다시 경쟁을 통해 드디어 교사가 된 신규 교사들이 '교직 탈출'을 목표로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10여 년 전 내가 경험했던 신규 시절의 학교와, 그들이 겪고 있을 지금의 학교가 어디서부터 얼마나 다를지 가늠할 수 없기에 섣부른 조언도 어렵다.


    이 경력에 교육 전문가는 가당치 않고, 그렇다고 행정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바 없기에 신규 교사들의 이탈을 막을 방법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이 직업을 오랜 시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 직업을 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의 경험을 담담히 나눌 뿐이다. 내가 그랬든 당신들도 결국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100개의 교실이 있다면, 100개가 훨씬 넘는 이야기가 있단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목표대로 풍성한 교실을 꾸려나가면 좋겠단 것. 자신이 가꾸는 교실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면 좋겠단 것이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과 슬픔에 함께 웃고 때로는 울면서, 그럼에도 행복하다 느끼며 '잘' 지내 바란다. 쓸데없는 일들에 상처받지 않길.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고귀한 우리의 일에 더욱 큰 자부심을 갖고 고군분투하길 바랄 뿐이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이 자신이 가진 진정성을 언제든 어디서든 발휘하길, 그 길에서 우리 서로 만나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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