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어느 날 엄마가 두꺼운 안대를 하고 계셨다.
단순히 가벼운 눈병에 걸린 줄 알았다. 그런데 백내장 수술을 하신 것이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엄마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셨다. 돌이켜보니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눈이 침침하고 따갑다고, 불편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나이 들면 다 그렇다던가, 병원에 가보라는 말로 무심히 흘려보냈다.
그러다 결국, 혼자 병원에 다녀오셨다. 스스로 수술까지 받고 온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엄마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서운하다는 표현은 없었지만, 체념 어린 눈빛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들 바쁘잖아. 혼자 가면 어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 말 속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결국 혼자 병원에 가서 수술까지 받고 오셨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심한 딸이었는지 깨닫고 가슴 한쪽이 싸하게 저며 왔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화를 냈다.
“못 알아들으면 알 때 까지 얘기를 했어야지!”
혼자 병원에 간 것이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인 것처럼 책임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건 핑계였다. 엄마는 분명 여러 번 말씀하셨다. 다만 우리가 귀 담아 듣지 않았을 뿐이었다.
백내장은 나이가 들면서 수정체가 혼탁해져 시야가 흐려지는 병이다. 점점 더 사물이 뿌옇게 보이고, 빛이 번져 보이며, 마치 안개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초기에는 불편함을 참으며 생활할 수 있지만, 점점 더 심해지면 결국 수술이 필요한 병이다. 수술 자체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지만, 고령의 환자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과정일 수도 있다. 엄마도 그런 두려움을 홀로 감당하셨을 것이다.
어린 시절, 벼 추수철이면 온 동네가 바빴다. 엄마도 옆집 추수를 돕느라 분주하셨다. 나는 친구 선희와 논두렁에서 놀고 있었다. 벼이삭을 주워 장난을 치다가 벼이삭의 티검이 내 눈에 들어가 버렸다. 눈을 비벼도 빠지지 않고 빨갛게 충혈만 심해졌다. 아프고 무서운 마음에 악을 쓰며 울었다. 그 소리에 엄마가 논밭을 가로질러 허겁지겁 달려오셨다.
엄마는 내 눈을 벌리고 후후 불어보시더니, 티가 나오지 않자 점점 안절부절못하셨다. 동네가 떠나가라 울어대는 나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시던 엄마는 갑자기 겉옷을 들춰 속옷을 꺼내셨다. 그리고 그 속옷으로 내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훔쳐냈다. 그 순간, 작은 티 하나가 쏙 빠져 나왔다.
나는 죽는 줄 알고 울었지만, 엄마는 어떻게든 해결하려 애쓰셨다. 병원이 멀어 2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시골에서 엄마는 그렇게 내 눈을 지켜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의 눈이 아팠다. 아픈 눈으로도 여전히 나와 가족을 돌보셨다. 혼자 수술을 받은 후에야 우리는 얼마나 힘드셨을지를 생각했다.
흐릿한 시야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셨을 엄마.
아침마다 눈을 뜰 때마다 흐려져 가는 세상을 견디며 살아오셨을 엄마.
가족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누구 하나 엄마의 불편함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에게 짐이 될까 봐, 혹은 바쁜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혼자 병원에 가셨을 것이다. 오랫동안 세상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다.
작은 티 하나에도 죽을 듯 울던 나는, 엄마의 고통 앞에서는 너무도 무심했다.
엄마가 얼마나 오래 흐릿한 세상을 견디고 계셨을까.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 오랜 시간, 엄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뒤늦게 엄마의 고통을 깨달은 나, 이제라도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지만 엄마는 더 이상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이제는 안다. 혼자 참고 견디지 않도록 더 많이 듣고, 더 자주 곁에 있어야 했음을 후회한다. 비록 엄마는 떠났지만, 기억 속에서라도 그 손을 꼭 잡고 싶다. 엄마가 보지 못한 세상을 대신 바라보며, 엄마를 기억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