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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쏙 빠지게 야단맞던 날

엄마의 자격

by 우먼파워


나는 결혼하자마자 바로 임신을 했다. 너무 빠른 임신에 속도위반이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학생 부부였다. 남편은 박사과정, 나는 석사과정 중이었다. 남편의 연구조교 월급으로는 신혼살림을 꾸리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시댁의 원조를 받아야만 했다. 공부를 하다가 싼 아기용품을 발견하면 사러 가야 했고, 논문을 빨리 마치기 위해 만삭이 된 배를 안고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했다. 배가 단단해지고 당기는 통증이 찾아오면, 배를 움켜쥐고 누워서 쉬었다. 학업과 출산 준비를 동시에 병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난하고 서툴지만 학생이자 부모가 될 준비를 해 나갔다.


논문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중, 갑자기 진통이 찾아왔다. 예정일을 8일 남기고 있었고 첫 아이는 예정일을 넘겨 낳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기에 가진통인 줄만 알았다. 논문마무리가 급해 수시로 압박해 오는 진통을 참고 있었다. 또한 병원에 일찍 가면 병원비가 많이 나올 거라는 걱정과 함께 참을 만큼 참다 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오후가 되자 진통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23분, 17분, 12분, 그러던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좁혀졌다. 그때까지도 책상 앞에 앉아 끙끙대는 나를 더는 볼 수 없다며 남편이 서둘러 병원에 가져갈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택시를 불러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택시 안에서도 여러 번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대기실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다.


“길바닥에 아기 빠트릴 뻔했어요.”


너무 늦게 왔다며 간호사는 벌써 출산이 70%가 진행되었다고 했다.


병원 도착하고,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과 장단의 아픔으로 여러 번 온몸을 떨어야 했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괴성을 수도 없이 지른 후 2시간여 만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가 내 품에 안겼다. 출산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의 감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아기를 내가 낳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으로 향했다. 불렀던 배는 홀쭉해지고 몸이 가벼워졌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잇따랐다. 젖이 쉽게 나오지 않아 고생해야 했고, 나오지 않는 젖을 어떻게든 빨리려고 아이를 안고 계속 씨름을 했다. 부풀대로 부푼 가슴은 빨갛게 성이 나 있어 만지기만 해도 질겁할 정도로 아팠다. 밤낮 없는 고생 끝에 5일째 유선이 겨우 뚫렸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깨서 울었고, 그때마다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는 일이 출산한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특히나 예민한 아이는 방문 여닫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고, 밤에도 열 번 가까이 깨서 울었다. 젖을 물려 겨우 재워도 작은 인기척에도 즉각 반응하는 아이였다. 낮에는 논문 준비로 쉬지 못하고 밤에는 자주 깨는 아이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수면 부족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어깨며 목, 팔다리, 온몸이 안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애 낳은 산모가 이렇게 안 쉬면 큰일 난다며 책을 펼치기만 해도 엄마의 야단을 맞아야 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나는 어쩔 수 없이 버티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버거웠던 어느 날, 간밤에도 수없이 깨는 아이를 안고 밤을 새우다시피 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가 논문 마칠 때까지 한 달만 키워주면 좋겠어. 죽을 것 같아.”


순간, 엄마의 눈빛이 번뜩였다. 늘 다정하고 온화했던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눈을 부릅뜨며 무섭게 말했다.


“엄마가 돼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네 자식을 누가 키워? 이 정도도 못 참으면 애 엄마 될 자격이 없는 거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여태껏 엄마에게 야단을 맞아본 적이 없었기에 매몰찬 엄마의 말은 비수가 되어 꽂혔다.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었고,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엄마는 달랐다. 냉정해 보일 만큼 단호했고, 눈물이 날 만큼 쌀쌀맞았다.


그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가 내게 퍼붓던 말은 질책이 아니라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다짐이었다. 엄마로서의 길을 걷는 데 있어서 힘들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아이를 키우는 일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책임지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엄마 역시 그렇게 나를 품고 지켜내며 길렀다는 것. 나는 비로소 엄마의 그 깊은 사랑을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고통을 견디며 엄마는 어떻게 다섯 명이나 낳고 키우셨을까. 나는 한 명 낳고도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엄마는 그 지난한 세월을 어떻게 버텨내셨을까. 문득 엄마가 새삼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엄마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긴 밤, 다시 아이가 울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그날 밤 가슴을 울리던 엄마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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