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아들 수료식에 다녀오고 며칠을 끙끙 앓고 말았다.
손에 불이 얻어져 있는 거처럼 뜨겁고 가슴과 팔에 통증으로 잠을 설쳤다. 처음 겪는 손바닥 열감에 몸의 여기저기에 손바닥을 대가며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안 되겠다 싶어 혹시 이런 증상이 있나 검색해보니 상당히 많은 글이 검색되었다.
가장 인정하기 싫은 건 ‘중년’, ‘갱년기’라는 단어가 포함된 증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고 딱히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몸에 손을 대고 식히는 건 한계가 있어서 겨우 일어나 비닐봉지에 얼음을 넣어 가제 손수건으로 싸서 손에 쥐고서야 잠을 좀 잘 수 있었다. 그래도 더 심해지지는 않았고, 3일에 걸쳐 열감은 서서히 사라졌다.
아파도 잠을 잔다는 건 회복 중이라는 증거 중에 하나다. 그래서 잠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모른다. 한 이틀은 손과 팔과 가슴의 통증으로 제대로 잠을 못 잤으나 토요일 밤에 며칠 만에 잠을 제대로 잤다. 그래서인지 조금 살 거 같았다.
일요일은 한 달 전에 잡혀 있던 버스킹이 있는 날이었다.
수요일에 아들 수료식이니 다녀오고 며칠 쉬었다가 참석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약속을 한 거였는데 예상과 다르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던 거다.
토요일에 참석이 힘들 거 같다고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새로운 곳에서 하는 버스킹이라 가보고 싶기도 하고 일요일에 컨디션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만에 토요일 밤에 잘 잔 거다. 하지만 버스킹을 가도 될지에 대해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거기에 당일 못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마음까지 더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몇 시간을 또 보내고 말았다.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제대로 회복하지 않고 움직인 여파가 클 거 같은 마음 사이에서.
이럴 때면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나도 모르는 답을 누구에게 구하려는 건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님의 말과는 반대로 나의 아픔을 여기저기 알리며 나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그리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지만, 결국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그 단순한 원리를 알면서도 묻곤 했었다.
과거 내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 점점 선택에 대한 자기 불신이 커지다 보니, 내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 옳은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일도 많았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결정하든, 내가 결정하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에 가만히 내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 한다.
버스킹 불참에 대한 의사를 전달하면 앞으로도 참여가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이번엔 내 몸이 우선이라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몸이 안 좋아 이번에 참여가 어렵다는 연락을 어렵게 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버스킹을 가지 않아서 컨디션이 나아진 게 아니라, 내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을 내려놓아서 좋아진 게 아닐까 싶다.
만약 내 선택에 ‘갔어야 했나?’ ‘못 갈 정도로 아픈 게 맞나?’라고 불신했다면, 그 생각으로 계속 아팠을지도 모른다.
옳고 그른 선택은 없다.
왜냐하면 각자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기 때문이다.
성장만 있을 뿐이다.
선택으로 인한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고 다음 선택에 적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경험한 것을 나의 언어로 정리했을 때 그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쩌면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거창한 할 일을 찾기에 앞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할지 작은 일부터 선택해보는 것.
남들이 뭐 그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냐고 해도 내 속도로 충분히 고려해보고 결정해 보는 것.
그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선택하면 경험하고, 경험하고 지혜가 생긴다.
지식이 많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지혜가 많으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아는 것만 많아 머리가 큰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삶에 적용하며 마음이 큰 사람이 되어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