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수고를 낮추어 말할 때 쓴다는 이 유명한 사자성어를 어찌하여 여태 몰랐는가 하는 무지함에 대한 반성은 잠시 접어두고라도, 듣자마자 꽤 생각해 볼 만한 말이라고 느꼈다. 특히 집에서 가까운 곳 여기저기에 말을 몇 마리 두고 사는 삶에 있어서 말이다.
물론 오늘날 개와 말의 "기능"은 저 단어가 생겼을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랑하는 가족, 내 새끼가 된 그 동물들에게 "기능"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 자체에 누군가는 발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 쉬는 것만으로든 아니면 더 나아가 주인을 등에 업고 달리는 식으로든 우리의 자발적 선택에 의하여 함께 하는 모든 동물은 인간의 행복 증진에 기여한다는 궁극적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라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 도리어 건강한 반려의 시작일 수 있다. 모호한 사랑의 감정, 혹은 역시 비슷한 맥락의 실로 희한한 이종 간의 촌수 계산(내 개가 나의 딸이라면 나의 부모는 내 개의 조부모라는 식)을 통해 "가족"으로 편입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동물을 사람 자식으로 대하는 우를 기꺼이 저지르며 살지만 말이다.
엄마가 무엇인지 모른다. 되어본 적이 없다. 달리 표현할 말도 모르겠고 어쩔 수 없이 입에 붙어 동물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긴 하지만 말하면서도 엄마가 무언지 잘 모르겠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엄마"라고 하면 사랑과 희생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나의 엄마로부터 그 둘 모두 받지 않았다. 동물을 아무리 많이 키워도, 죽음을 감수하고 낳아 결국에는 남겨두고 먼저 떠나야만 하는 자식을 키워보기 전까지는 아마 진정한 엄마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주인이고 싶다. 말의 노고를 아는 주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