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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향기로웠던 사케

식당에 도착하여 웨이터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저녁 가로등 불빛이 배어 들어오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차콜 그레이 빛의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의 분위기와 일식당이 주는 아늑함은 잘 어울렸다. 저녁 메뉴로는 프랑수아는 카라야케 튀김, 마리-킴은 마제 소바를 시켰다. 사케와 우롱차도 함께 주문했다. 우롱차를 시작으로 음식들이 차례차례 나왔다. 따뜻한 우롱차를 작은 찻잔에 따라 마시며 마리-킴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코코하나는 이전에도 와본 적이 있어요?”


“아니요, 그랑팔레 주변의 일식당을 찾아보았는데, 여기가 나왔어요. 음식 사진들도 정갈하니 좋아 보였고 무엇보다도 후기가 좋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로 정했죠.”


“아, 그랬군요. 전 여기 마제 소바를 좋아해요. 쫄깃한 면발이랑 시즈닝과 다진 돼지고기과 뜨거운 우동 면발 위에 올라간 날계란의 조합이 딱 적당한 것 같아요. 식감도 좋아하고요.”


“여기 자주 와봤나 보네요?”


“네, 한 때 자주 왔다가 요즘엔 안 왔어요. 오래간만에 온 것이긴 해요. 그런데 변한 것이 하나도 없네요.”


프랑수아는 마리-킴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궁금했던 질문을 던진다. “마리-킴, 지금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요? 남자친구 있어요?”


마리-킴은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어, 근데 우리 지금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나요? 저녁에 둘이 식사하자고 해서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요?”


눈웃음을 치며 말하는 마리-킴의 대답을 들으며 프랑수아는 이내 마음이 놓인다. “아 맞아요,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이어져서 확인을 하지 않았거든요.” 이어서 음식과 따뜻한 사케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니 한결 분위기가 편안해지고 무르익어간다. 프랑수아가 향긋한 사케를 입에 한 모금 머금고 사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몇 년 전에 사케를 처음 마셔봤을 때, 따뜻하고 맑은술이라는 것에 놀랬어요. 신비로운 향과 맛이더라고요. 와인은 여러 재료를 혼합해서 따뜻하게 뱅쇼[1]로 마시지만 사케는 사케 하나의 재료로 만들잖아요. 깔끔한 끝 맛이 정말 인상적인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사케가 생각보다 빨리 취해요, 맛있다고 홀짝홀짝 마시면 어느 순간 정신이 몽롱해져요. 술과 몸이 함께 닳아 오른다고 할까요? 향긋하게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기억이 나지 않게 된답니다. 하하.”


맛있는 요리와 술이 만들어주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향신료처럼 작용해 둘 사이의 긴장감이 덜어지고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저는 프랑수아가 박물관학에서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되게 신기했어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저에게 말을 건네었으니까요. 강의실에서 보았을 때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이 강했거든요. 이렇게 따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저도 마리-킴에 대해 정적이고 차분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비슷한 느낌을 주었나 봐요.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리-킴은 차분하지만 되게 주도적인 사람 같아요. 자신의 이야기도 먼저 잘하고 삶에서의 선택도 주변의 영향보다 스스로 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부모님께서 저를 선택해 주셔서 지금의 제가 존재하는 거잖아요. ‘부모님들이 사진 속의 저를 보고 그 당시에 선택을 안 했으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종종 해요. 그러다 보면 선택을 할 때 스스로 적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제 삶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그러다 보니 더 독립적인 딸이 되었어요. 부모님께서 제가 사춘기 때는 입을 다물고 좀처럼 말을 안 한다고 속상해하셨지만, 그 점도 체념하듯이 빨리 받아들이셨어요. 입양한 딸이라는 점이 거기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작용했겠죠?”


프랑수아는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훌훌 털어놓는 마리-킴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어서 대답한다. “마리-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실 저는 그저 마리-킴의 겉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관심이 생겨 말을 걸었거든요. 단순히 말하면 좀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요. 마리-킴의 짙은 흑발과 깊은 눈동자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즐겨 입는 채도 낮은 베이지색 셔츠랑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화려함이 아닌 차분함 가운데 느껴지는 신비로움이라고 해야 하나, 적절한 표현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가 즐겨 입는 셔츠 말씀하시는 거군요. 전 그 셔츠를 입은 날이면 스스로 동아시아 고문서가 된 느낌을 받아요. 너무 웃기죠? 고문서에는 정말 딱 그 두 가지 컬러, 베이지와 블랙만 존재하잖아요. 원래는 아이보리색 종이였겠지만 세월에 따라 빛이 바래 베이지색이 된 오래된 한지들이요. 근데 왠지 이렇게 입으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저랑 정말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도쿠리에 담겨 나온 사케 3병을 비우고 나니 취기가 올라왔고 마리-킴의 설명처럼 기분과 분위기가 무르익어 기억이 살포시 흐려지기 시작한다. 연핑크색 니트를 입은 마리-킴의 얼굴도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10시가 되어 식당을 나와 상제리제 거리를 걸으며 프랑수아는 자연스럽게 마리-킴을 그녀의 아파트까지 데려다준다. 사케의 향긋한 향과 온기는 호감을 느끼는 두 사람을 더 가깝게 해 주었다. 파리 8구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마리-킴의 아파트에는 사랑을 갓 시작한 연인의 페로몬으로 가득 찬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얼굴 일부 같았던 베이지색 안경을 벗고 마리-킴을 바라본다. 마리-킴도 하나도 묶고 있었던 길고 짙은 반곱슬 흑발의 머리를 푸른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있었던 옷을 차례로 벗고 침대 위에 누운 두 연인의 밤은 채도 높은 붉은 오렌지 색처럼 뜨겁다.


파리 8구에 위치한 마리-킴의 작은 옥탑방 아파트(chambre de bonne)[2]는 아기자기 하지만 간소하고 깔끔했다. 어린 시절 프랑스 부모님과 스위스 리기(Rigi) 산에 여행 다녀오면서 구매한 사이즈가 작은 소 목각인형[3]과 산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책장 선반 위에 올려져 있다. 마리-킴의 작은 어깨를 꼭 껴안은 어머니의 손길이 다부지고 애정 어려 보인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청량하고 맑은 모습의 웃음이다. 온 가족이 행복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사진이다. 먼저 눈을 뜬 프랑수아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옆에서 자고 있는 마리-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옷을 대강 챙겨 입고 책장 위에 있는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 속의 마리-킴과 부모님은 외모는 전혀 다르지만 영락없는 단란한 가족이다. 스위스의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하얀 구름 떼와 평화로워 보이는 마리-킴의 가족은 한 폭의 플랑드르 풍경화[4] 같다. 프랑수아가 마리-킴의 가족사진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 막 일어난 마리-킴이 프랑수아를 부른다. “프랑수아 잘 잤어? 좋은 아침이야.”


마리-킴을 향해 웃으며 뒤돌아보니 창가를 통해 스며들어온 자연광을 받은 마리-킴의 얼굴은 더욱더 빛이 난다. 창백해 보이던 얼굴이 자연광을 받으니 따뜻하고 생기 있어 보인다. 아름다운 흑발은 더 강인해 보이고 깊은 두 눈동자는 아직 꿈속에 있는 듯 몽롱하다. 인상을 가리는 검은색 뿔테 안경이 사라지니 그 속에 숨겨져 있었던 세밀한 표정의 변화가 하나하나 다 보인다. 마리-킴은 프랑수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미소 짓는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1년간 6개월간 서로의 집을 오고 가다가 루브르 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프랑수아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프랑수아의 집이 조금 더 넓고 마리-킴이 일하게 된 프랑스 국립 도서관과 거리도 더 가까웠다. 파리 도심에 위치한 오래된 고풍스러운 아파트들은 19세기 이전에 건설된 건물들이 대부분이기에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마리-킴이 거주했던 옥탑방이 아닌 3층에 위치한 점도 한몫 차지했다. 프랑수아의 집으로 살림을 합치는 날 마리-킴이 들고 온 짐은 아주 단출했다. 마리-킴이 소장한 책과 매거진, 부모님과 리기 산에서 사 온 사진과 목각인형, 옷 몇 가지와 화장품이 전부인 마리-킴의 짐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프랑수아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찬찬히 마리-킴의 물건들이 놓일 장소에 짐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책장의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여기 두어도 되지?”


“응, 그럼! 원래 그 사진은 책장에 있었잖아.”


마리-킴은 스위스 리기 산에서 부모님과 함께 촬영한 가족사진을 애지중지했다. 9살에 부모님과 함께 한 여행이었는데, 더 어린 시절의 여행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리-킴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여행이기도 하고 높은 산을 처음 올라간 경험이기에 인상 깊었다고 한다.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리기 산의 정상에서 마리-킴은 맑고 깨끗한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영원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마리-킴이 11살이 되는 해에 헤어졌다. 친구로 지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해 주면서 마리-킴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뒤로 아버지와 종종 만났지만 함께 여행을 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연인사이가 되면서 옥탑방에 위치했던 마리-킴의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던 어느 날 마리-킴은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프랑수아에게 별다른 감정 없이 담담하게 설명해 주었다. 프랑수아는 차분히 이야기를 들으며 마리-킴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슬픈 감정을 자제하지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프랑수아는 마리-킴을 따뜻하게 포옹해 주며 그녀의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렇게 마리-킴은 유년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이야기를 프랑수아에게 공유해 주었다.


마리-킴과 프랑수아의 동거는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아침 7시경에 기상하는 생활 습관도 비슷했고 에스프레소로 간단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도 동일했다. 주로 프랑수아가 먼저 일어나서 씻고 커피를 준비하고 있으며 마리-킴이 일어나 하루의 시작을 함께 했다. 스토브에 올라간 비알레띠 모카포트가 기관차를 연상시키는 픽픽 소리를 내며 커피의 향기를 아파트 내부로 퍼트리기 시작하면 그 소리와 향기에 마리-킴이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간단하고 소탈한 아침의 시작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며 에스프레소에 라빠르쉐 설탕을 녹여 마시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풍미가 깊은 설탕이 녹아든 달콤한 커피는 아침에 제격이었다. 둘은 간단한 요리도 종종 만들어 먹었는데 마리-킴은 첫 데이트 때 먹었던 마제 소바를 즐겨 만들곤 했다. 간편하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좋아했다. 프랑수아는 간단한 파스타와 샐러드를 자주 준비했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고 정갈했다.


프랑수아보다 루브르 학교를 한 학기 먼저 들어온 마리-킴이 한 학기 먼저 졸업하면서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동아시아 미술사를 전공했던 마리-킴은 자연스럽게 동양 고문서 파트에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빛바랜 베이지색 종이와 검은색 글씨 사이에서 마리-킴은 매일 새로운 향해를 시작했다. 새로운 발견과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은 저녁시간이 되면 프랑수아에게 공유해 주었다. 둘의 세부 전공분야는 달랐지만 마리-킴의 이야기는 19세기 미술사를 전공하는 프랑수아에게 흥미롭게 들려왔다. 그런데 학업을 마치고 프랑수아가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에 학예사(conservateur)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이 생겨버렸다.


          







[1] 와인에 오렌지, 레몬, 시나몬 스틱, 사과 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서 끓여 마시는 유럽지방의 겨울 음료




[2] 파리에 위치한 옥탑방 형태의 아파트는 원룸의 형태가 많으며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간다.




[3] 리기 산의 상징은 소이다. 리기 산 기념품 샵에서는 소를 모티브로 한 크고 작은 목각인형과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4] 플랑드르 풍경화는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등을 중심으로 나타난 실제 풍경을 그리는 미술사조로 16~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전의 르네상스 및 중세 시대의 풍경화는 현실의 배경이 아닌 이상적인 자연의 장소를 그린 것이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풍경화가 플랑드르 풍경화의 좋은 예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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