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과 숙빈 최씨의 흔적
대한민국 사극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뤄졌던 히로인을 뽑으라면 바로 장희빈(장옥정) 일 것입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들이 장희빈의 주연을 맡았을 정도로 장희빈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관심을 한데 모으는 존재감 있는 강렬한 캐릭터입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외모를 칭찬하고 있는 여성은 장희빈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장희빈과 함께 등장하는 두 여인인 있습니다. 인연왕후와 숙빈 최씨이지요. 늘 현숙하고 선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양반가문집의 딸 인연왕후와 그녀의 몸종으로 시작해 사극의 결말 부분에 존재감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숙빈 최씨입니다. 숙종 때부터 영조 때의 시기를 걸쳐 활동했던 겸재 정선은 당파싸움과 얽히고설킨 세 여성의 삶과 왕권이 급변하는 시기를 살았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작품 중에 <육상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현재는 청와대 근방에 위치한 육상묘는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숙빈 최씨의 묘는 소령원으로 경기도 파주에 위치해 있습니다. 육상묘는 1753년 육상궁으로 승격되어 1912년까지 여섯 명의 후궁의 사당이 건립되어 현재의 칠궁이 되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소령원을 후에 영조로 즉위한 영인군이 직접 묏자리를 찾은 장소로 삶에서 우여곡절을 끊임없이 겪은 최씨는 죽음 이후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나 봅니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잘 알려져 있듯이 드라마에서 천민 출신으로 많이 그려졌으나 숙빈 최씨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본래 출신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혈혈단신으로 살다가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부임하던 길에서 발견한 남루한 소녀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운 뒤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함께 궁궐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숙빈 최씨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영조가 정리한 내용으로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을 평생의 콤플렉스로 여겼던 그가 가능하면 좋게 포장하려 했기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많은 설들이 존재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서 존재한 것은 영조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 학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정확한 줄기라면 그것은 숙빈 최씨가 어려서부터 인현왕후와 깊은 연을 맺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숙빈 최씨와 숙종이 처음 조우하는 장면인 무수리였던 최씨가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를 그리워하며 공을 들이는 모습으로 그들의 깊은 인연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숙종 재임 시기 남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점차 거세지고 왕후와 후궁들을 둘러싼 암투극도 남인과 서인 싸움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숙종 15년(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과 숙종 20년(1694년)에 일어난 갑술환국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위치가 서로 바뀌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쪽으로 권력이 치우치는 당파의 힘을 견제하고자 한 숙종의 정권교체의 전략으로 해석됩니다. 후에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역학을 한 사람이 숙빈 최씨입니다. 서인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던 그녀는 인현왕후가 사망한 뒤 숙종에게 장희빈이 왕후를 음해하려고 하는 저주를 걸었다고 밀고했다고 합니다. 본래도 불같은 성정이었던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게 되고 이로 인해 남인 세력은 힘을 잃게 됩니다.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이 후사를 볼 수 없자 그는 동생인 숙빈 최씨의 아들 영인군을 왕세자로 책봉합니다. 몸이 허약했던 경종이 일찍이 사망하게되고 영인군은 영조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 과정도 피바람이 날리며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출신으로 인해 속앓이를 합니다. 당시 무수리는 출퇴근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루머도 존재했습니다. 실제로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소문이었습니다. 영조는 숙빈 최씨가 숙종의 차남으로 출산한 아들로 영조 앞에는 일찍이 세상을 먼저 떠난 친형이 있었습니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후궁이 된 이후에 숙빈 최씨의 장남인 영조의 친형을 출산한 후 그 뒤에 영조를 낳았기에 이는 애당초 성립이 될 수 없는 루머입니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인 숙빈 최씨에 대한 기록과 사후의 위치를 높이는데 집중하게 됩니다. 조급해하지 않고 선례를 분석하며 서서히 움직인 영조는 숙빈 최씨의 사당을 현재 청와대 근처에 위치하게 했으며 그의 재임기간 동안 200회나 들렸다고 합니다. 영조 29년 1753년에는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묘소인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숙빈 최씨의 위상을 높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 자신의 태생적인 약점을 보완한 행보였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육상묘>는 육상궁이 되기 전의 모습으로 육상묘는 사당이긴 하나 여전히 소박한 초가집의 모습입니다. 그림의 상단에 적힌 텍스트는 육상묘를 건립하는데 기여한 18명의 관원에 대해 적혀있으며 하단의 그림 부분에는 육상묘와 그 뒤에 있는 백악산이 그려져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만 63세인 1739년에 <육상묘>를 그렸습니다. 옅은 담채와 수묵의 농담 조절로 그려진 이 작품은 문인화의 정신을 보여주는 남종화풍의 영향이 뚜렷합니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이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느낌의 이 작품에서도 자연은 주요한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육상묘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과 원경에 그려진 늠름한 북악산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양화적인 시선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면 그림의 주인공인 육상묘가 크고 중요하게 그려졌겠지만 자연을 중시했던 한국화의 경향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숙종 재임시절 두 번의 환국과 영조 즉위와 관련된 신임사화를 겪으면서 겸재 정선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김수황, 김창집 부자를 떠나보내게 됩니다. 몰락한 사대부 가문 출신의 겸재 정선에게 시서화를 접하게 해 주고 학문의 길로 나아가게 해 줬던 안동 김씨 부자를 정치적인 소용돌이 가운데 먼저 보내고 후에 이 그림을 그리던 겸재 정선의 마음은 많이 착잡했을 것 같습니다. 그간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을 것 같습니다. 담담한 시선으로 기록화에 충실한 육상묘에서 적막함이 배어져 나오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이 실렸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거대한 자연 속에 죽은 이를 기리는 사당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소재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사극에서 종종 보았던 화려한 모습의 장희빈과 숙빈 최씨와 너무나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육상묘>는 엄청난 권력을 소유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게 되는 덧엎는 인간사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권력과 정치적인 싸움은 오늘도 어느 조직에서나 계속됩니다. 권력을 잡은 자는 안정을 위해 반대되는 세력을 없애고 싶고 반대되는 세력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고 싶은 것인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욕심을 조금 버리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욕심을 버리는 것이 생존과 결부되어 있을 때는 이것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극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장희빈과 숙빈 최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삶을 태도를 겸허히 다져보는 시간을 가지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 글은 이우석 교수님의 『겸재 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와 국가 유산청 문화유산 포털과 파주시청 문화관광 페이지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