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직하고 처음으로 맞은 휴무,
코트슬로우 비치를 다녀왔다.
코트슬로우 비치는 배우 히스레저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백사장과 가깝게 붙어 있는 잔디 언덕 때문인지 다른 비치 보다 아기자기한 분위기다.
그런데 여기는 고등학생들도 전부 비키니를 입는구나.
래시가드 넣어두고 미리 비키니 사서 입고 오길 참 잘했다!
참, 래시가드. 여기서는 서핑하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안 입는다.
해외여행만 가도 한국인들은 래시가드로 칭칭 감고 수영하는데
외국인들은 죄다 비키니 입고 태닝 하다가 온천하듯이 물에 몸만 담근다.
물론 한국도 서핑이나 웨이크 보드가 유행하면서 래시가드가 퍼진 거겠지만
아직은 비키니 입기 부끄러운 한국인들의 몸 가리기 목적이 더 큰 것 같다.
한국에서 이렇게 입고 돌아다니는 건 감히 꿈도 못 꿀 일.
몸매 보정용이 아니라 뽕패드도 없고, 엉덩이도 과감하게 보이는 비키니.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입고 있는 이곳에서는 전혀 남사스러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기분은 내 인생 첫 노브라, 그 짜릿했던 첫 해방감을 떠올리게 했다.
때는 바야흐로 스물셋,
친한 언니와 떠났던 홍콩 여행.
푹푹 찌는 홍콩의 여름에 질린 언니의 난데없는 노브라 선언.
“나 오늘 브라 안 한다!“
“언니..? 진심이야? 그래도 되는 거야?”
“한국도 아니고 여기 아무도 신경 안 써. 아니 뭐 볼 테면 보던가.“
“언니.. 여기 스페인 아니라고요.”
“쿨링 소재고 뭐고 더워 죽겠다고요. 너도 신세계를 맛볼 것이야.“
스페인 유학생 출신인 언니가 오버하는 거 아닐까 했지만,
정말 놀랍게도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말 어찌나 편하고 시원하던지.
노브라는 무슨 조금만 파인 거 입어도 난리 나는 한국에서만 살았던 나에게는 정말 신세계였다.
여기서는 평소에 브라탑, 레깅스를 편하게 입고 다니고 노브라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한국처럼 숨 쉬듯이 남의 몸매를 평가하고 성적 대상화 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인 거겠지.
그래서일까. 몸매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비키니를 입고 바다를 즐긴다.
남들에게 시선을 둘 필요도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 몸은 자유를 얻었다!
생각해 보면 비키니는 수영과 태닝을 즐기기 위한 옷이지
좋은 몸매를 갖춘 여자들만 입을 수 있는 특별한 옷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 다른 모양의 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걸?
다양한 체형을 가진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존재랍니다.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고
자유롭게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호주.
한국에서는 여름을 싫어했는데
호주에서는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일상복 보다 비키니 쇼핑을 더 많이 하고
흰 피부 강박에서 벗어나 태닝도 하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물놀이하는데 왠 영국 남자아이가 말을 걸며 인스타를 물어봤다.
스물네 살, 영국에서 왔단다. 이 눔의 자식, 너 누나 몇 살인지 알고 말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