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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Aug 30. 2024

"멋지게 나이 들어줘서 고마워"

<8> 소설가가 된 보랏빛 단발머리 옆동 친구 B

소설가 B와 난 1990년대 초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한 국민학교 3학년 6반 교실에서 만났다. 교내에 멋들어진 정원이 조성돼 TV 드라마의 배경이 되곤 하는 곳이다.


교실 중앙에 톱밥을 압축한 목재 땔감을 떼는 난로가 자리했고, 3교시가 끝나면 당번이 플라스틱에 우유를 한가득 담아와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담임은 수업 시간이 끝나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아들을 우리 교실로 데려와 공부시켰다. 그런 게 별문제가 되지 않던 시대였다.      


우리는 남자 반장과 여자 반장(기억이 맞다면)이 각각 됐지만 곧바로 친해지지는 못 했던 것 같다. 하교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쳤고 우리가 707동과 708동에 각각 산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지만, 그 사실이 친해질 이유가 되진 않았다.

아직은 열 살. 남과 여, 친구가 뭔지 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교성이라는 능력이 발현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된 결정적 계기는 ‘보도부’라는 이름의 학급 조직이었던 것 같다.

‘보도 지침’이 살아있던 시절도 아닌데, 학급에는 반 소식을 전하는 보도부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름 자체가 굉장히 폭압적이다.      


기자의 꿈이 처음 피어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는 성실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일은 대부분 B가 도맡고, 나는 남자 친구들과 공을 찼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열 살 소년들의 짓궂음 또는 망무가내식 떠넘김이었을 것이다. 열 살 남자아이는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댕기머리를 한 소녀는 별 불평이 없었다. 묵묵히 그 일들을 홀로 해냈다. 토요일 보도부 모임에서 분명 신문을 만들다 도망쳤는데, 다음 주 월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게시판에 보도부 신문이 걸렸다. “고맙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는지 궁금하다. 하나의 글을 밀도 있게 끝내는 작가 DNA가 어릴 적부터 자리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중학생 B의 단발머리.

중학교 입학 후 귀밑 3cm로 머리 길이가 제한되면서 소위 “어릴 때 이쁜 애들 다 긴 생머리 때문이었네”라는 말들을 했다.

하지만 뭔가 B는 달랐다. 그 시절 충격적으로 등장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처럼 (실제 B는 교지에 학교 선배인 김윤아를 인터뷰해 싣기도 했다). 까까머리 남학생의 눈에는 보랏빛 눈빛이 단발머리와 함께 빛나 보였다. 색깔이 없거나 되바라진 회색 여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고유한 분위기를 냈던 것 같다.

자우림 김윤아가 헤이헤이헤이로 처음 데뷔했을 시절의 모습

중학교 시절까지도 난 B의 세계에 당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름 조숙하고 애늙은이 소리 듣는 청소년기였지만, 정신 연령의 차이가 현격했다. 제대로 된 대꾸를 해주기에는 나의 밑천은 보잘것없었다.


완전한 소통이 이뤄지진 못했지만, 개포동이라는 공간이 우리를 묶는 힘은 제법 컸다. 대중문화가 폭발하기 시작한 90년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전환이 꿈틀대던 대전환의 시기, 개포동은 농도 높은 유년기를 보낸 고향이었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강남이 아닌 ‘개포동’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곳은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화려함과는 다른 호젓함이 있는 곳이다. 90년대 양재천 하나를 두고 대치동과 개포동의 결은 많이 달랐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 만에 마주쳐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개포동을 공유했다는 사실 자체는 큰 의미였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우리의 접점은 더 옅어졌다. 입시의 중압감이 높아지면서 집 앞에서 마주칠 일도 줄었다. 그러던 중 집 주변 ‘진학 독서실’에서 B와 다시 마주쳤다. 머리만 복잡하고 몸과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 나약함이 극으로 가던 시기였다. 빈곤한 마음에 뭐라도 부여잡고 싶었던 고등 시절에 동네 친구와의 조우는 반가움 이상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눠진 신발장 앞에서의 잠깐 눈인사도 큰 힘이 됐다.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발장을 통해 쪽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초중등 시절 유행했던 교환일기처럼 격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꽤 진지했다. 신해철과 이적, 윤상, 김동률 음악에서 시작된 대화는 015B의 <신인류의 사랑>에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요즘 연애의 가벼움에 대하여, 또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가사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대화의 시점은 고등학생 시절이었지만, 초중등 시절 각자의 경험과 함께했을지 모르는 경험이 소환되기도 했다. 그 사이 서로 몰랐던 지점이 발견되기도 했고, 모르고 지나갔던 서로의 상처가 공유되기도 했던 것 같다.      

고3 시절. 쪽지 대화의 주제는 급기야 안중근과 유관순에 이르기도 했다.

그 시절의 개똥철학이 우리에겐 절대적인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획일화된 인생을 살지 않고 데미안처럼 껍데기를 깨고 나가야 한다는 데까지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다. 다르게 살기 위해선 닥치고 지금 당면한 입시를 잘 치러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헛헛해하기도 했다.

그 시절 생각의 회로를 공유한 친구는 B가 유일했다. 모두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전투적으로 달려가던 고3 시절. 그나마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 게 그였다. 많이 컸다지만 아직 뇌 용량이 딸렸을 나의 비관론을 B는 너그럽게 받아줬던 것 같다. 20대 중반까지 그 쪽지들을 보관하다 정리가 필요했던 어느 순간 모두 처분한 건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지점이다.      


20대가 되고, 새로운 관계가 유년기를 대체하게 되면서 우리의 연락도 뜸해졌다. 가끔 동네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서로에겐 각자의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 그리고 서로의 세계가 자리했다. 새로운 에너지를 찾기보다는 과거의 따뜻함을 꺼내보곤 다시 서로의 세계로 돌아갔다.

“진학 독서실에서 참 순수했다 그지?”, “20대가 됐지만 해결되는 건 별로 없네”와 같은 대화가 주를 이뤘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경조사도 건너뛰며 어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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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

추억을 들추는 것조차 큰 결심이 필요한 마흔 줄에 들어서 B의 소식을 신문지면으로 접했다. 감사한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뭔가 이룬 것 같은 착각 속에 30대를 보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흔을 맞았는데, B는 아직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내고 있었다. 멋지게 늙어주고 있어서 진정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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