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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Aug 23. 2024

“문학성은 나중에, 일단 쭉쭉 가보자”

<7> 나뭇잎 사이 빛줄기 같은 피드백들

  여러 날을 고민했고, 고민 끝에 2명에게 피드백을 구했다. 한 명은 동거인, 다른 한 명은 비동거인.     

 

  아내의 첫 반응은 “신기하다”였다.

  ‘신기하다니 도대체 무엇이?’라고 반문하니, 이렇게 이런 픽션 한편을 다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팩트체크를 하는 사람이 팩트 없는 이야기를 완성한 사실이 조금은 신기했나 보다. 아니면 저런 건조한 사람 안에 저런 이야기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이 놀랐을 수도 있다.


  같이 산 세월이 상당한데도 서로 몰랐던 포인트를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신기한 포인트였다. 마흔 줄에 들어서 소설을 쓰겠다며 유난을 떠는 아재에 대한 생경함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 ‘소질 있다’는 작은 칭찬을 던지기도 했지만, 이내 “일단 더 써봐. 아직 첫 작품이잖아”라며 챗GPT로 쓰는 단편소설 강좌의 링크를 보내기도 했다. 아무래도 ‘신기하긴 하지만 아직 뭔가 폼이 올라오지 않는’ 그런 수준의 글로 읽혔나 보다.      

  소설을 써 내려가면서 했던 고민을 아내도 똑같이 감지하고 있기도 했다. “근데 너무 자전적이다. 그나마 소설 속 자기 아내는 나랑은 달라서 다행이네.”


  “조금 더 자세하게”, “문학적 측면은?”, “한 큐에 읽히긴 해?”라는 추가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아내는 이미 십수 년간 내 기사와 칼럼을 봐주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자세하고 성의 있는 피드백이라 감사해야 했다.     


  소설을 쓰기 전 종종 일상의 잔상을 글로 적어 지인들과 나누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쉽지가 않았다(6화 “좋네” 짧고 건조한 피드백이 더 상처가 되는 이유. 참고). 그러던 중 이집트에 사는 벗 E가 떠올랐다.      


  △젊을 때 망나니처럼 살다가 늙어서 철들고 어른이 되는 부류 △나처럼 어릴 적 애늙은이처럼 조숙한 척하다가 마흔이 넘어 애처럼 나약해진 부류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인 듯 아이인 듯 내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마도 E는 마지막 부류가 아닐까 한다. 20대 시절이나 지금이나 ‘어른 같지 않은 어른’, ‘아이 같지 않은 아이’의 풍모를 지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환경이 주어지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중심을 지키면서도 모든 것과 융화할 수 있다랄까.      


  환경에 이리저리 치이는 몸만 마흔 인 부류와는 다른. 뭔가 내가 원하는 진중한 피드백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친구다.

  나의 졸고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품어주면서도 적실한 피드백과 과제를 안겨줄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몇 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도 있었고, 전화번호조차 제대로 없는 E. 카카오톡 아이디에 남아있는 E의 사진을 찾아 뜬금없는 톡을 보냈다. 방금 대학 수업을 마치고 “뭐 하냐”라며 문자를 보냈던 시절을 상상하며.      


  ‘흐흐흐’

  보통 '하하하'라고 웃지만, 그는 '흐흐흐'라고 웃었던 것 같다. 뭔가 '하하하'보다 사안을 더 진하게 느끼고 있는 감탄사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름의 풍파 속에서도 유머를 잊지 않은 허탈함과 해학이 느껴지는 웃음이 아닐 수 없다.


  E는 그만의 바이브가 담긴 '흐흐흐'로 세월을 단숨에 건너뛴 뒤 “빨리 글 보내봐”라고 반겼다. “천천히 시간 남을 때 한번 봐바”라고 했지만 30분가량 만에 첫 피드백이 왔던 거 같다.     


[E] 몰입하게 됐다. 초고를 쓰면 용두사미가 되기 십상인데

[소진] 난 용두사미라고 생각했어

[E] 뒤로 갈수록 힘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큐에 읽혔다는 말. 신입 기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기사는 한 큐에 읽혀야 해“라고 강조해 왔건만. 끝까지 읽혔다는 E의 말은 엄청난 안도감이었다.     


  상상치 못했던 지점들에 대한 인사이트도 있었다.

  ‘이야깃거리는 괜찮은데, 니 철학을 쓰지 마. ㅋㅋ 공감을 강요하면 안 됨. ㅋㅋㅋㅋ. 그냥 그럴 수 있겠구나 싶은 여지 좋아.’     


  소설 속 부부의 사이를 DMZ으로 묘사했던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보수적 민주화(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 구구절절한 설명이 독자들에겐 불편할 거 같다는 거였다. 물론 본인은 정치학도인 친구의 20대를 보는 거 같아 반가웠지만 말이다.     


“문학성은 나중에 노리고. 일단 쭉쭉 가보자. 그러다 보면 니 스타일이 생길 거 같아.”     


  여느 전문가보다도 완벽한 피드백이었다. 듣고 싶은 말이 정해져 있는 답정너 지망생에겐 우문현답에 가까운 답이었다.

 

 “아직도 멋지게 살고 있구나.”

  E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자 E는 “숭고한 밥벌이 성실히 하는 네가 더 멋있다”라고 받아쳤다.


 하정우, 전도연 주연의 영화 <멋진 하루>의 마지막 장면,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속 코모레비(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가 떠오르는 대화였다.


  피드백은 충분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나무 가지 사이를 통과하는 빛 한 줄기를 본 것으로 만족한다. 일단 한 편을 끝냈고, 지속가능한 라이터의 삶의 서막을 열었다는 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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