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소설가 지인 강보라 작가를 연상케 하는 것들
“세상에 나온 지 30년 가까이 됐을 텐데, 이렇게 힙할 수가 있나.”
문득 ‘그래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지’라며 놀라는 순간이 더러 있다. 어떠한 형용사나 부사로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 감흥인데,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힙하다’라는 표현이 가장 잘 들어맞는 것도 같다.
서울 도심을 운전하다 너무 빨리 변해버리는 거리 풍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무심코 켠 라디오에선 90년대 하이틴 스타 박지윤의 <Steal away>라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복고 풍의 신시사이저 전주가 나올 때부터 어깨에서 꼬릿꼬릿한 느낌이 들더니, 한 소절 한 소절 내뱉는 가사에서 ‘와우’라는 혼자 말이 절로 나왔다.
상당히 끈적거리는 그루브가 흐르는 데 또 그 위로 청아한 목소리가 더해지니 ‘이게 도대체 뭐지?’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박진영의 곡인줄 알았는데, 윤일상 님이 만든 곡이었다. 오 예전 형님들 진짜 힙하게 음악 했구나.
특히 노랫말이 너무 힙하다.
<요즘 널 보는 눈빛 달라지지 않았니? 어쩜 그렇게도 무뎌. 정말 모르는 거니? 숨기고 싶지 않아. 그와 나의 사랑을 이젠 너에게도 나의 존잴 알려야겠어.(중략)>
죄책감 전혀 없이 남자의 애인에게 당당하게 포기하라고 외치는 부분에선 “그 시절 정서가 맞나?”라는 생각도 밀려왔다. 2010년대 투애니원의 <Lonely>에서 느꼈던 파격적인 감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걸크러쉬 함이었다.
사실 박지윤은 지금으로 따지면 아이돌에 가까운 스타였고, 락앤롤 베이비였던 나에겐 별 감흥이 없는 가수였다. 아티스트라기보다는 그냥 연예인으로 여겨졌다. 농도 짙은 표현으로 대박이 난 <성인식>이라는 곡이 ‘박지윤=상업 가수’라는 편견을 깊게 각인시킨 것도 같다.
그랬던 내가 30년 가까이 지난 음악에 반응하며 힙함을 느끼고 있는 건 참 신기하면서도 재밌는 현상이다. 내가 돌고 돌아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고, 유행이 돌아오든 첫 유행 때는 모르던 힙함을 뒤늦게 느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Steal away>에서 시작된 박지윤 앓이는 2000년경 발표한 <환상>이라는 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알아버린 그의 떠들썩한 결혼 소식도, 싱어송라이터로 업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평가들도 모두 박지윤의 힙한 매력을 배가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
아티스트 박지윤에 대해 팬심을 이렇게 장황하게 풀어놓은 것은 사실 소설가 지인 강보라 작가의 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강 작가의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가 바로 ‘힙함’이기 때문이다.
그의 등단작 <티니안에서>의 첫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던 순간이 기억난다. 아마도 박지윤의 <Steal away>를 오랜만에 듣게 됐을 때와 비슷한 감흥이었다.
아주 익숙하지만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그루브의 음악이 전주에 깔리고 있었다. 익숙함 속에 짜릿한 기운들이 밀려왔다. 기꺼이 강 작가가 깔아놓은 그 그루브에 몸을 맡기며 여행길에 동행하게 됐다. 한편을 다 읽는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매우 강렬한 초행길이었음이 분명했다.
사실 아주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었다. 매일 하루살이로 마감 압박을 받던 시절이었기에, 소설은 휴가지나 출장길에 한 권 사가는 이상으로 즐기기 힘든 고급 취미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물론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티니안에서>의 그루브는 오랜만에 몸속을 타고 들어오는 위스키처럼 급격하게 내 심장을 두들겼던 것 같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22213120005364
<티니안에서>의 힙한 그루브는 사실 굉장히 디테일한 묘사에 기반하고 있다. 흑인 음악처럼 흐느적흐느적 대충대충으로 휙휙 했는데 나오는 태생적인 그루브가 아닌. 굉장히 치밀한 계획과 전략 그리고 디테일한 묘사를 한 층 한 층 쌓아가면서 한 덩어리로 뭉쳐졌을 때 나오는 묘한 분위기였다. 마치 티니안으로 가는 길을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일 것이다.
가령 이런 표현들... 약간은 무심한 듯, 정말 프로페셔널하지 않지만 날것 그대로임이 느껴지는 이런 문장들에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두 남자의 장난기 어린 눈빛에서 한계에 다다른 육식 동물의 허기가 느껴졌다.>
<문신한 남자의 이름은 제임스, 십자가 귀걸이의 이름은 제레미였다. 어쩌면 그 반대였던 것 같기도 하다.>
<네 사람의 안전벨트를 확인한 기장이 마이크가 달린 헤드셋을 건네며 직업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가가 드러낸 주제의식은 에곤실레의 그림 같이 파격적인 것일지 모른다. 하루키를 처음 접했을 때 <상실의 시대> 미도리에게 느꼈던 떨림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파격을 되바라지지 않게, 포장지 속의 포장지 안에서 빨간 점 하나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고급스러운 드러냄은 첫 등단작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엄청난 내공으로 다가왔다. 문학성과 힙함은 이런 기술적인 터치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 작가의 등단 이듬해 작품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그런 멋과 향이 더 진해진 작품이다. 발리 우붓의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그의 초반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또다시 기꺼이 그 여행에 동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인연과 굴레를 벗고 밤샘 풀 파티에 뛰어들고 싶은 기분에 휩쌓이기도 한다.
게스트하우스를 찾을 때마다 들던 묘한 설렘과 기대와는 달리 마주하게 되는 현실적인 치댐들이 정말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묘한 지적 문화적 우월감과 허영(평론가들은 이 지점을 구별짓기라는 포스트모던적 이론으로 표현했지만), 그리고 여행지 인연들이 한층 밀도 있게 묘사돼 있다. 아직 보는 눈이 일천한 아마추어 지망생의 눈으로만 봐도 <티니안에서>보다 한끝 더 진화한, 그리고 앞으로의 그의 글을 기대케 하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
박지윤과 강 작가에 이어 최근 무척 힙하게 다가오는 것이 하나 더 있다. VIP 선물계의 에르메스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한국 수공예 명품 브랜드 ‘채율(CHEYUL)’이다.
회사 일로 어쩌다 소개로 알게 된 브랜드인데, 엄청 힙하다. 이미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일본 기시다 총리 등 귀빈들에게 선물되면서 입소문을 제법 탔고, 손예진 전지현 등 유명 배우들도 채율의 작품들의 주요 컬랙터라고 한다. 유명 백화점 명품관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국내 브랜드라고 한다.
이런 유명세를 감안하지 않고도 작품을 한번 접하면 그 매력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또 이런 브랜드를 밀고 나가는 자가 궁금해진다. 영세하고 고집 센 국내 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과 함께 상생 구조를 만들고, 글로벌한 관심을 끌 정도로 힙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경주의 밀도 깊은 이야기와 뉴욕 소호의 자유로움이 묘하게 겹치는 힙함을 지닌 공예품들을 보고 있자면 이 가구들을 놓을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채율의 대표님이 우리 세대라는 것이다. 30대 중후반(?)의 당찬 기운이 느껴지는 이정은 대표와 처음 조우했을 때 “이 분, 앞으로 몇 년 뒤면 만나기 어려운 분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플래그십 매장은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었다. 금싸라기 땅에 조성된 3개 층에 이어진 전시관들은 과감한 투자 마인드와 성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도전으로 보인다.
작가적 영감을 위해서라도 강 작가가 채율의 작품을 접해봤으면 좋겠다. 이정은 대표와 만나면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힙한 것들은 통하는 법이니까.
https://digitalchosun.dizzo.com/site/data/html_dir/2024/07/04/20240704800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