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퇴고의 고통을 끊어 준 작가 지인의 한 마디
‘퇴고’는 기자에겐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개고’라 불리는 퇴고를 기자라면 거의 매일 행한다.
1차 마감 시간이 지나도 세상 일은 멈추지 않는다. 윤전기가 멈춘 새벽에도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된다. 그렇기에 새로운 사건과 팩트들은 계속되고, 기자들의 삶도 계속된다. 그렇기에 ‘개고 지시’는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는다.
10여 년 전 스포츠 기자 시절 마감에 따라 같은 기사를 5번 넘게 고쳐 쓴 적도 있다. 야구 경기 결과를 싣기 어려운 지방판에는 당일 야구 결과가 아닌 가라(가짜) 기사를 싣는다. 경기 결과와 상관없는 기획기사나 인물 기사를 써두는 것이다.
그리고 9시 50분경 맞는 두 번째 마감 때 경기 결과 일부를 담은 40판(서울 등을 제외한 지역에 가는 기사) 기사를 쓴다. 대게는 오후 11시 마감되는 최종 45판 기사를 한번 더 업데이트했지만, 아주 중요한 기록이나 결과가 나오면 9시 50분과 11시 사이 41판을 한번 더 쓰기도 했다.
어떨 땐 미리 모든 기사를 준비해 두고, 경기 종료와 함께 숫자만 넣고 마감하는 순간도 적지 않다. 특히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 체조 양학선, 리듬체조 손연재의 경기에선 금메달시, 은메달시, 동메달시, 메달획득 실패 시 등 4가지 버전을 미리 다 띄워두고, 경기 결과를 보고 숫자 몇 개만 추가하며 마감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극한 개고(퇴고)의 경험은 정치, 사회 등 어느 취재 현장에서도 큰 자산이 된다. 손이 빨라졌고, 숫자 등 팩트에 대한 정확도를 높여주는데 좋은 훈련이 됐다. 뉴욕 타임스는 새내기 수습기자들의 교육을 할 때 스포츠 분야를 반드시 거치게 한다는데, 다 이런 연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글은 고칠수록 무조건 좋아져”
주니어 기자 시절 선배들의 이 말이 무척이나 싫었지만…. 이제 15년 차 꼰대가 돼서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 이 말은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필휘지를 휘두르는 천재형 라이터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동의해야 한다고 본다.
현장 기자를 지나 데스크 역할을 하게 되면서 조금 더 신봉하게 된 측면이 있다. 한숨 나오는 후배들의 기사를 고치면서 “한번 다시 고쳐볼래?”라고 의문형 지시를 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고치는 편이지만…. 누가 고치든 글은 산으로 가기 보다 제 길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브런치의 ‘발행’ 버튼이 있듯, 신문사에는 ‘D를 찍는다’는 표현이 있다. 기자들이 자신의 기사에 데스킹을 요청한다는 뜻이다.
D를 찍기 전에 자기 글을 찬찬히 점검해 보는 습관을 들여보라는 한 선배가 있었다. 그는 특종을 잘하거나, 깊이 있는 글을 생산하는 스타일의 기자는 아니지만, 꼼꼼함의 끝판왕으로 불리며 고위급들의 신임을 받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성실함과 꼼꼼함이라는 전통적 승부방식이 재능을 이길 때가 제법 많은 것 같다.
퇴고는 성실의 영역이고, 나는 지난 기자 생활 동안 그 퇴고의 과정에 꽤 익속해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소설의 퇴고는 조금은 달랐다. 삶을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팩트를 미세조정하고, 문장의 흐름을 연결하는 것과는 달랐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했고, 내 깜냥의 부족을 탓하게 했다.
초고를 쓸 땐 무조건 쓰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쓰자.라고 다짐하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퇴고의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됐다.
1. 일단 재미가 없다
2. 문학성도 없다
3. 돈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4. 그렇다면 난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이 같은 상념들은 이 땅의 지망생들이 하루에도 수차례 하게 되는 생각들일 것이다. ‘고민은 적게 하고 행동하라’는 독설가들의 동기부여 영상을 보며 멘털을 잡아보려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상념들 말이다.
부정적인 감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전에 잘라버리기로 했다.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완전 원고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니. 일단 생각은 최대한 접고, 끝까지 써 쓰자고 마음먹었다.
퀄리티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내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르는 그 이야기를 일단 끄집어내 보자.
어차피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어느 매체에 게재해야 하는 글도 아닌 것을. 쓰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 버리면 되는 글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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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를 하다 보면 너무 많은 내가 보인다.
‘내 안의 것들을 끄집어내 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기에 당연한 결론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것은 일기인가 소설인가 헷갈릴 지경이다. 급기야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서도 내가 보인다.
물론 ‘자전적 이야기’가 아닌 소설이 있긴 할까.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만큼 농도 있게 취재해 쓸 자신은 없다. 지어내 쓸 자신은 더더욱 없다. 이미 세상에서 쓸 거리를 가장 많이 아는 소재(나 자신)가 바로 여기 있는데, 이를 버리고 굳이 가상 인물을 만들려고 낑낑거려야 할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2024년 현재 시점에서 소설을 쓰는 행위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소진된 나를 위로하고, 찌꺼기 상념들을 태워 버리고 다시 나아가기 위함이지, 무언가 타인이나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현재로서는 자전적인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지인의 지인’ 김기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김기태 작가는 물론 제3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가 차용한 다양한 모티브와 글감들은 자전적인 것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취재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살면서 느끼고 축적했던 이야기들이 기술되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예술가나 연예인들의 이름과 작품들이 그렇다. 그가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깊게 위로받으며 플레이리스트에 숨겨뒀던 곡들을 고이 꺼내 소설에 한 자씩 적진 않았을까.
예컨대 볼 빨간 사춘기에 대한 서사는 노골적이라 반갑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초기에는 <볼 빨간 사춘기의 음악이 세상에 나올 무렵>이라고 썼다가 말미에는 <볼 빨간 사춘기가 1인 그룹이 되는 사이>라는 표현으로 시간적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응팔, 응사에서 종종 드러나는 방식이다.
자전적 소설에 대한 나의 의심을 소설가 지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소설가 후배 D에게 내 이야기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가 진짜 같지 않다고 물었다. 선배 소설가의 답은 달랐다.
“사실 추리소설이나 SF 소설을 쓰는 작가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자전적인 게 많더라고요. 자전적이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우리 곁에 없는 공상 과학 소설의 이야기 속에도 작가의 삶과 세계관이 투영되기 마련이라는 D의 말은 꾀나 큰 위로가 된다. 일단 자전적으로 시작하며 조금씩 스토리의 날개를 붙이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으로선 절대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과학이나 미래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언젠가는 써보리라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첫 작품의 퇴고를 완료해야 한다. 보면 볼수록 고칠 게 많아지는 퇴고의 무한루프를 단숨에 잘라버릴 수 있을까. 그레고리우스의 매듭을 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