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감동
국어 교과서의 추억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는 수업 보다 교과서가 좋았다. 읽을 게 마땅치 않던 시절 언제든 꺼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책 같은 느낌이랄까. 그 안에 담긴 수필과 소설 때문이었다. 피천득 <인연>, 알퐁스 도데 <별>과 <마지막 수업>, 김소운 <가난한 날의 행복>, 황순원 <소나기>, 김유정 <동백꽃>까지. 내용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의 느낌은 지금도 뚜렷하다. 사춘기 청소년 시절 국어 교과서의 글들은 내게 진통제와도 같았다. 그리고 내 감정 근육 어딘가에 아로새겨져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고등학교 1학년으로 기억된다. 교과서를 처음 받아 들고 자취방에 들어앉아 뭐 읽을 게 없나 하며 책장을 뒤적거렸다. 김소운 작가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 눈에 들었다. 네댓 페이지의 짧은 산문이지만 읽고 난 후 느낌은 강렬했다. '가난'이라는 익숙한 단어와 함께 '행복', '사랑' 그리고 '결혼'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낯설게 다가왔다. 배고픈 아내에게 초라한 밥상을 내민 게 못내 미안한 가난한 남편의 쪽지 한 장, 삶은 고구마를 받아 든 가난한 시인에게 위트로 응수하는 현명한 아내, 놀랐을 아내의 손을 내내 놓지 않던 사과장수 남편의 애틋함까지. 수필 속 주인공들이 만들어준 따스함으로 인해 차가운 자취방에 잠시나마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범우문고 134
오래전 약속시간이 조금 일러 근처 교보문고에 들렀다. 읽을거리를 찾다 범우사에서 출판된 김소운 작가의 동명 수필집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책이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출퇴근 길에 여러 번 읽었다.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정원사의 기도>, 억울한 일을 대하는 지혜가 담긴 <행복의 장>, 그리고 <향충香蟲>에 담긴 우화를 포함해 스물다섯 편의 수필에서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수필이 주는 강렬한 느낌으로 인해 전철 속 사람들을 한참 쳐다보며, 저들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까 하는 공상에 빠져든 적도 있었다.
춘천 빵집 사장님
수필 속 주인공은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 몇 해 전 유퀴즈 <춘천> 편에서 유재석 씨가 만난 빵집 사장님이 그 주인공이다. 빵집 사장님의 사연은 이렇다. “춘천에 오기 전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공예품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저는 한지공예를 하고 아내는 수공예 작품을 만들어 판매했어요. 어느 날 건물주가 바뀌면서 임대차 해약 통보를 받았습니다.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결국 급작스레 공예품 가게를 접고 쫓기듯 춘천으로 올라와 빵집을 열었습니다. 아내는 근처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어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유재석 씨가 빵집 사장님께 물었다. “혹시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으세요?” 빵집 사장님은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지금 주 6일 근무인데 가능하면 꼭 5일 근무를 하고 싶어요.” 다시 묻는다. “휴일이 하루 늘어나면 뭐 하시려고요?” 빵집 사장님은 수줍게 웃으며 답한다. “아내와 제가 가게를 운영하기 때문에 딸과 놀아줄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그 하루가 생기면 딸과 시간을 보내는데 온전히 쓰고 싶어요.” 퀴즈를 내기 전 유재석 씨가 다시 묻는다. “상금 백만 원을 받으면 뭘 하고 싶으세요?” 빵집 사장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웃으며 답한다.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그때 마침 빵집 사장님에게 아내의 전화벨이 울렸다. 사장님은 멋쩍은 듯 전화기를 붙들고 유퀴즈 촬영 중이라며 전화기 넘어 아내에게 설명했다. 유재석 씨가 아내의 전화를 넘겨받고 덕담 삼아 말한다. “남편분이 상금 백만 원을 받으면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아내분에게 주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잠깐의 정적과 함께 전화기 넘어 아내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웃음꽃 피던 촬영장이 순간 숙연해졌다. 빵집 가게 모두에게 그 마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유재석 씨가 아내분께 애써 묻는다. “남편분 얘길 듣고 많은 생각이 드셨나 봐요?” 전화기 넘어 아내는 진정되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 사람은 자기한테는 하나도 안 하고 나한테만 다 주니까요. 춘천에 정착하기까지 너무나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옆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남편이 함께여서 지금까지 견뎌낸 것 같아요.”
함께 읽는 책 : <가난한 날의 행복>, 김소운,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