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손인 나는 요리할 때 에너지가 빨린다. 잘하지도 못하는데 느리기까지 하다. 몇 가지 음식을 몇 시간에 걸쳐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쌓여 다리가 후들거릴 때 즈음엔 도움을 요청한다. 옛날엔 고된 일을 할 때 노동요를 불렀다고 했나. 공기 반 소리반은커녕 음치인 나는, AI 스피커에게 힘든 몸을 위로해 줄 음악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조성진의 라흐마니노프 틀어줘~“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진 그의 음악에 정신을 실어 보내면 40분간의 환상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지친 몸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런데, AI 조차 오작동 하는 날이 있었다. 웬걸, 얼토당토않은 올트 팝이 나오는 게 아닌가. ‘뭐냐 ‘하며 설정을 바꾸려는 순간, 언제였는지 들었었던, 그것도 설레게 들었던 음악들이 줄지어 나와 걸음을 멈추었다.
스피커가 오작동하지 않았다면 다시 듣지 못했을, 느끼지 못했을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간혹,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잘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잘못 내린 정류장, 잘못 산 물건, 잘못 넣은 양념, 잘못 탄 비행기, 잘못 들어간 모임.
지금 생각하면 어리던 신혼시절, 남편과 의기양양하게 남쪽 끄트머리 통영으로 떠났다. 이왕 왔으니 배에 차를 싣고 섬으로 떠나 보기로했다. 그런데 선박 위에서 사투리로 들려오던 선장의 안내방송을 잘못 듣고, 목적지가 아닌 어느 조그마한 이름 모를 섬에 내렸다. '여기가 아닌가 봐'를 인지했을 때, 배는 이미 우리가 원래 가려고 했던 섬을 향해 떠나는 중이었다. 다음 배는 5시간 후쯤 오후 늦게나 온다 하니, 이름 모를 섬에 갇힌 셈이다. 잠시 망연자실하다 10분이면 돌아볼만한 섬을 둘이 올라가 보기로 했다. 좁은 오르막길,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통영 앞마다의 작은 섬들과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상이라고 할만한 언덕에 올랐을 때, 나는 처음 보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심지어 잘못 내디딘 발걸음이 선물한 장관. 그곳엔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와, 그 위엔 수놓아진 작은 섬들과 바위들이 있었다. 짙고 푸른 바다 위로는 금빛 햇살까지 뿌려지고 있었다. 언덕 위로는 코스모스가 꽃길처럼 수놓아져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둘이 눕기에 아늑했던 그 언덕 위에 우리는 잠시 쉬기로 했다. 정확히는 우리를 엉뚱한 곳에 놓고 가버린 배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멈춰버린 시공간 속에 있는 듯했다. 드디어 저 멀리 익숙한 배가 다가오는 게 보였을 때, 언덕을 내려갔다.
안도와 아쉬움과 놀라운 감격의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느 글로벌 여성 리더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그녀는 잘못 탄 뉴욕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만났고 그들은 한 달 뒤에 결혼을 했다. 지금도 서로의 길을 비춰주는 관계로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우연히 들어간 교육장에서, 또 관계자의 실수로 잘못 배정된 모임에서 최고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 최고의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서로가 가는 길을 비춰주는 사람들.
우연이, 잘못된 순간들이 행운으로 바뀌는 그런 일들이 있기에 삶은 재미있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