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소녀가 사랑한 것들 04 | 몽연
외로움이 싫은 사람
외로움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싫은 인간이 하나 있다. 여기 조울증 소녀가 그렇다.
혼자 있을 때 보통 외로움을 느낀다. 나는 참 이상하게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했다. 특히 모르는 사람. 확신의 MBTI I성향을 지닌 나는 지금 검사해도 I가 80%가 나올 정도다.(실제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을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만나서 대화하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능숙하지 못했다. 특히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색할 것 같은 약속은 거절하고 아무리 친한 친구들과의 약속이라도 굳게 다짐한 후에 날짜를 잡곤 했다. 다른 이와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훨씬 좋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사람을 싫어하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한다.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에 Yes라고 대답하기엔... 외로움이 많아졌다. 진정한 홀로서기로 혼자가 된 나는 침대에서 눈을 뜨면 외롭다. 혼자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화장을 하면서도 계속 외롭다. 그 옆에 누군가가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얘기하던 도중에 생각한다. ‘아... 외롭다.’라고. 고독을 즐겨 씹던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외로움은 돈이 많이 드는 친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집에서 증식한다. 나에게 붙은 외로움이라는 벌레는 침대 위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심지어는 점점 증식해 내 방안을 가득 채울 때도 있었다.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상대해야 하는 놈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대로 외로움에 짓눌려 침대 위에 깔려있을 때 생각했다. 밖에 나가볼까?
사람이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백 번 옳다. 매일 밖으로 향하면서 외로운 감정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돈은 많이 들지만 그만큼 외로움을 덜어내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도 밖에 나와 있을 정도로 매일 외출을 한다. 할 게 없으면 카페에 가 글을 쓰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거나 혼자 댄스 연습실에 가 스트레스를 푼다. 나서서 약속을 잡는다니. 정말 많이 변했다는 증거다.
쉬려고 자퇴를 했지만 더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 나를 보고 상담 선생님께서 쉬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말이 옳다. 쉬어야 하는데 쉬고 싶지가 않았다. 처음엔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내 선택이 옳았고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 나태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증명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혼자서 열심히 살아보려니 어지간히 외로웠던 것 같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나를 외롭게 만들었구나.
책을 읽다가 발견한 말이 있다. 외로움을 적응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우리는 모든 것에 기준을 세워 잘나고 못난 것을 구분하기 바쁘다. 다른 사람들보다 외로움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보다 그저 외로움이 싫은 사람으로 부르자. 못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하자. 증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 말고 외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나를 절벽 끝으로 내몰지 말고 안아주자. 나를 외롭게 만들지 말자.
날개 없는 비행
이렇게 보면 거창하지만 현실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는 시기였고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가장 맨몸으로 부딪히기 좋은 상황이었다. 때맞춰 진행하는 공모전이 꽤 있었다. 그중 몇 개를 골라 신청해 보기로 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공모전에 청소년 부문은 단편소설 부문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단편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설을 여러 개 써서 썩혀두고 있던지라 소재는 많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주변에서 반응이 제일 좋았던 글 하나를 골라 수정하기로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쓴 글이라 어휘와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곳이 눈에 보였다. 지금도 엄청나게 필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해치운 밥그릇 수를 믿기로 했다.
수정이라고 쓰고 갈아엎는다고 부른다... 수정은 무슨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갈아엎는 수준으로 다시 쓰게 되었다. 더 나은 원고를 만들 수 있다면 아무렴 좋았다. 공모전이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하면서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더 완벽하게, 더 자연스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떤 일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임한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즐긴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은 꽤나 멋있다. 그 당시 내가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사라진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오히려 반대이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공모전은 당장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닐뿐더러 첫 시도에 상을 탈 확률은 매우 저조했다. ‘자존감이 더욱 깎이면 어쩌지?’하고 고민했지만 결과에 중점을 두지 말자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왜 결과만 생각해? 좋아하는 것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동안 결과만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내 자존감이 바닥난 이유였다. 그런데도 또다시 결과만 바라보다니 이렇게나 어리석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공모전에 도전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다리면서도 생각한다. 나는 이미 성장했고, 결과가 어떻든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 멋있었다고. 날개 없는 비행일지라도 한 번 뛰어봐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결과가 훤히 보이는 일이라도 뛰어보는 용기, 고민하는 과정들이 나를 성장하게 만든다는 것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글을 사랑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감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럴 때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싶은 순간이 늘 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쓰면서 이때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을 쓰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은 내 감정을 곱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경우 나의 모습이 투영된다. 나는 처음에 누군가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나의 모습을 담게 되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나를 이해하게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특히 1인칭 시점으로 쓴 글들에서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글을 사랑하고 나는 덜 외롭고 덜 차갑고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썩혀둔 감정이 없어 예민해지지 않았고 표출하지 못한 감정들을 글에 담기 시작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시든, 수필이든 중요하지 않다. 글을 쓰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많다.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더라도 내 감정을 직접 내 손으로 써 내려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면 환자에게 글 쓰기를 권유하는 장면이 있다. 나에게 있었던 일, 기억나는 일들을 적어보고 부정적인 말들에 밑줄을 친다. 드라마 속 환자의 경우 대부분이 부정적인 말들이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나를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이 어렵다고 느껴질 땐 일기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짧게라도 적어보고 찍어둔 사진도 돌아보면서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감정. 이게 포인트다. 삶을 누군가에게 보고하듯이 적는 글이 아니라 그 순간에 느꼈던 나의 감정을 위주로 적어보는 것. 아직 글 쓰기를 망설이는 자들에게 감히 말해본다. 글을 쓰는 순간 진짜 나의 모습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