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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n 25. 2024

영화 <시민덕희>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이 싫지만, 쉽기만 한 영화도 싫은 내가


영화 시민덕희를 보고 나서

 

GV 빌런 고태경을 읽었더니, 오랜만에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보고 싶어진 김에 봤다. 뭘 봤느냐면 넷플릭스가 매번 추천으로 띄우던 시민덕희였다.

 

처음엔 이 영화가 어땠는지 달랑 한 줄로 써 뒀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영화를 본 만큼 자세히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아래는 시민덕희를 보면서 또는 다 보고 난 뒤에 남긴 기록이다.

 

모쪼록 시민덕희를 보던 내가 잘 전달되기를.

 



(1).

 

“나도 대출 돼요?”

“당했나 봐….”

“이 개새끼, 어떻게 잡아요?”

 

보이스 피싱을 당하며 인생 최악의 궁지로 몰린 덕희. 그러나 덕희를 궁지 안에 몰아넣은 재민 역시 궁지 안이기는 마찬가지다. 살며 절대 도달해선 안 될 지옥 또는 궁지 속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탈출구로 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후 보이스 피싱 피해자 덕희와 보이스 피싱 조직의 말단 직원 재민이 살기 위해 함께 몸부림치는 이야기, 영화 시민덕희.

 


(2).

 

이 세상은 약자가 다수인 주제에 도통 약자를 위해 돌아가질 않는다. 새어 나갈 생각밖에 없는 가난이라는 구멍을 대출로나마 막고자 했던 덕희는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하고, 청춘 다 바쳐 잘 좀 살고 싶었던 재민은 취업 사기를 당해, 보이스피싱범이 됐다. 이런 두 사람을 그나마 진창에서 꺼내 줄 사람은 또 이런 사람들이다. 참 뭐 같은 세상이다.

 

아마도 시민덕희는 그 세상을 꼬집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쉽게 꼬집어 대서, 아쉬운 통증만 잠깐 남았다가 그마저 영화가 끝나며 단숨에 잊혔다. 원래 가볍게 꼬집어 봐야 꼬집히는 순간에나 간지러워서 웃고, 조금은 따끔했을 때만 짧게 인상 찡그리다가 말뿐이니까.

 

영화 시작 전에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했다는 정보가 제공됐는데, 어째서인지 이 말이 자꾸 떠오른다.


때로는 우리 인생이 영화보다 더 영화야.


영화가 끝나자마자 영화의 모티브였던 실제 사건을 찾아보았고, 시민덕희가 더더욱 아쉬워졌다. 꼭 이런 전개여야 했을까. 너무 웃기려다가 또는 너무 울리고 싶어 하다가. 저 두 가지 욕심을 반복한 끝에 얻은 결과물은 단순해도 너무 단순했다.

 

게다가 결과물만큼 뻔하디뻔한 빌런 설정과 대사로 내 집중력은 틈만 나면 영화 따라 딴 길로 샜다. 세상에 저런 뻔하디뻔한 빌런이 넘쳐서인지, 아니면 쉬운 영화로 만들고자 가장 쉬운 길만 골라 다닌 탓인지. 영화 중후반부터는 가만히 시민덕희를 듣기만 하며, 이따 뭘 할지를 계획했다. 그런데도 가끔 시민덕희를 보는 순간 곧바로 전부 이해됐다. 딴짓하면서 볼 영화 추천해 줘! 하면 시민덕희를 말해도 될 것 같았다.

 


(3).

 

영화가 끝나고

전해지는 세 가지 현실이 더 흥미로웠다면 어떡하지.


 시민덕희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 속 김성자 씨는 세탁소를 운영한다.

포상금을 내건 경찰은 여태 보이스 피싱을 고발한 시민에게 포상금 1억을 지급한 적이 없다.

김성자 씨는 당시 보이스 피싱 총책이 제안해 온 합의금을 거절했다.

 

역시 영화 주인공보다 어떤 인생의 주인공이 훨씬 더 재밌는 걸까. 쉽게 따라오게끔 꿰맞춘 덕희의 삶은 궁금하지 않았지만, 절대 쉽지 않았을 인생을 헤쳐 나갔을 김성자 씨 삶은 들여다보고 싶었다.

 





(4).

 

경찰서 안이 피해자들로 북적인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느라 피해자는 다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바보 취급당한다. 심지어 보이스 피싱을 당하다니. 와. 요즘 세상에 보이스 피싱 당하는 사람도 있어? 천치도 이런 천치가 없기에 경찰서조차 외면한 이들은 자신을 찾아온 덕희라도 붙잡아,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쌈짓돈 빼앗긴 사람. 조금이나마 숨통 트이려다가 숨 막히기 직전인 사람. 은행원인데도 보이스 피싱에 당한 사람까지. 중구난방 그 자체였던 시민덕희 속에서 그나마 기억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나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뭐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시민덕희는 억지스럽다.

 

가까스로 이야기를 쌓아가다가 별안간 덕희의 아이들로 눈물 쥐어짜 내려 애쓰는 시간, 하루 벌어 하루 겨우 살기는 마찬가지인 동료 봉림이 덕희의 아이들에 흔들려서 함께 칭다오로 향하는 시간이 얹어지면서 넷플릭스가 왜 나와 시민덕희 사이로 93%나 되는 수치를 입력했는지 의아했다. 그래도 끝까지 봤다. 믿고 뻗댈 만한 것은 젊음뿐이라 고액 알바 사기를 당한 이들 때문에. 낡은 봉고에 짐짝인 양 실리는 이들을 봐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저들 중 하나였을 때가 있었다.

 

사무실에 와서 본인 소설을 받아써 주면 한 시간마다 삼만 원씩 준다는 아르바이트 제안에 회까닥 돈 적이 있었다. 당시 아무도 나를 알아봐 주지 않았는데, 그 사무실 사람만 내 이력서 옆에 읽음 표시를 띄워 주었다. 아무도 내게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고 할 줄 몰랐는데, 그 사무실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찾던 적임자라며 내일 당장 출근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정작 도착한 사무실은 다단계의 중심지였고, 이후 도망치느라 죽을 뻔했었다. 그때 내 달음박질은 영화 시민덕희 속 추격 씬보다 더 살벌했었다. 내 기준 그렇다.

 

어찌 되었든. 믿고 뻗댈 만한 것은 젊음뿐이라 뭐든 쉽게 믿었던 내가 만일 그들에게서 어떤 선의든 찾아내려 조금 더 애썼더라면. 나도 재민처럼 인생 반응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른 덕희를 찾아야 하는 삶 속이었겠지. 그러지 않으면 젊음조차 빼앗긴 채 죽어 갔겠지. 그 순간을 돌이켜보느라 시민덕희와 작별할 수 없었다. 그저 휴대 전화로 다꾸 스티커를 구경하고, 신중히 장바구니로 옮겨 담는 동안 시민덕희를 틀어만 뒀다. 그딴 걸 대체 누가 믿느냐고 우스워하는 순간이 유달리 절실했었던 나를 대충이라도 기리고 싶어서.

 

시민덕희는 별로였다.

그런데 내가 사는 세상도 별로다. 더 별로다.

 

세상이 그딴 걸 좀 믿어도 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딴 것쯤 아무리 맹신해도 맹신이 내 인생보다는 안 커지면 안 되나. 그딴 것쯤 한번 믿었다고 두 번 다시는 멀쩡히 살 수 없는 세상은 너무 야박하지 않나.


이렇듯 세상이 너그러워지길 바라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런 세상은 굴뚝 밖 같기도 하다. 나나 다른 사람들이 굴뚝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런 세상이 오면 좋을 텐데’와 ‘좋기만 하면 뭐 해’하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5).

 

덧붙이는 생각.

 

그나마 시민덕희에서 애심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어, 좋았다. 인물 자체는 잘 모르겠고(그저 조연을 위한 조연다운 인물 설정이었다), 단순히 애심의 스타일링이 취향이었다. 안은진 배우의 다른 스타일링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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