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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n 26. 2024

조카와 처음 뽀뽀하고 나서

이승윤 - 꿈의 거처


(1).

 

조카가 생겼다.

 

언니 어렸을 때와 똑같이 생겨서 처음 봤을 때는 귀엽지 않았다. 언니를 귀여워할 순 없으니까.

 


(2).

 

이제 조카는 세 살이 되었고, 가끔 이모 이모 한다. 내가 이모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이모 소리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나도 몰랐던 걸 그 어린애가 어떻게 알고 나한테 어떻게 이러지. 그리고 어제 세 살짜리 조카와 처음으로 뽀뽀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입으로 나를 바보라 하면서 뽀뽀를 해 줬다고. 그 애가 알긴 할까.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 애의 모든 게, 이 오래된 세상 중 가장 귀엽다.

 

왜 나는 그 애가 귀여워졌을까.

 


(3).

 

애써 조카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냅다 영화관으로 가는 중이다. 여태 나는 나밖에 몰랐는데, 조카 생각만 하면 더불어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차츰 나를 좀먹는다. 그렇다고 결혼이 하고 싶다거나 나도 언니처럼 아이를 낳고 싶어지진 않는다.

 

그저 그런 생각들만 했다.

 

언젠가는 조카와 꼭 포옹해 보고 싶다는 생각. 조카 세상에 보호자 입지가 줄어들 즈음 언니를 꼭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 조카 근처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더 펼쳐 나가면 언젠가 학교에 입학할 조카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우리 이모야!”하고 자랑하는 걸 전해 듣는 상상. 언니한테 사 달라고 하기에는 쓸모없는 걸 몰래 나에게 보여 주고, 우리 둘만의 비밀을 선물로 받아 가는 상상. 사춘기가 온 조카 때문에 언니가 그 언젠가 우리 둘의 엄마처럼 애끓을 때면 술 사 먹이는 상상. 여기서 또 펼치자면 언젠가 내가 죽으면 내 전 재산을 조카에게 넘기자마자 슬프지만 든든해진 조카 얼굴.

 

이토록 이타적이었던 적이 없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에 조건 없이 내주기만 하는 애정을 담아 본 적 역시 없어서 유치한 영화라도 봐야 할 성싶다. 그래 놓고 정작 안경을 두고 나왔다. 이제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희미해져 간다는 징조일까. 너무 넘겨짚으면서까지 외곬의 삶을 흩트리고 싶은 걸지도. 실은 이 버스가 언니 사는 집 앞까지 가길 바라면서. 안경 없이도 자꾸 뚜렷이 보이는 언니랑 조카를 보고 싶은 거면서. 또 아니라고 우기느라 시간만 축냈다.

 

그래도 영화관에 도착해서 잠자코 혼자 영화 한 편을 봤다. 내내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오락가락이 정도를 넘어섰다. 나는 혼자가 좋은 거야, 함께하는 것이 좋은 거야. 전자이길 바라지만, 조카와 함께인 것만은 좋아서 이 문장조차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모른다.

 


(4).

 

연애 중에 결혼하자는 말을 유행어인 양 쏟아낸 적이 내게도 있었다. 그런데 유행어에 진심으로 진심을 담는 사람은 없지. 여느 유행어가 그러듯이 또는 여느 사랑처럼 결혼하자는 말은 지나가는 말 중 하나였다.

 

여전히 내 가족을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확신은 유효하다. 딱히 타인을 삶이나 애정 범주에 끌어들이기도 싫고, 게다가 여전히 내 이상형은 티모시 샬라메뿐이다. 근데 티모시 샬라메와는 말이 안 통한다. 그나마 확실히 전할 수 있는 말은 아이 러브 유 정도. 그뿐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가 예고 없이 머리카락 또는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면 확 화가 난다. 즉, 나는 여전히 혼자가 편하다. 누군가와 너무 가까워질 때마다 그 누군가를 아니꼽게 보느라 사랑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편하다. 이렇듯 나는 사랑이 불편하다. 사랑하는 내가 불편하다.

 

그런데도 조카는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유효타다.

 

어느 정도로 한 방 먹였냐면. 내가 결혼하면 안 그래도 쥐뿔밖에 없는 재능과 재산을 조카 아닌 애먼 배우자가 낚아채겠다며 벌써 이 바득 간다. 우습다.

 

어느 정도로 조카가 신경 쓰이냐면. 오늘 영화관에서 맨 마지막으로 나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사랑은 아래로 향해야 오래 사나. 마주 서듯 사랑한 전 연인들을 다시 곱씹어 보면, 조카가 가지고 놀다가 흥미 잃은 빵보다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유행어인 양 결혼하자면서도 정작 전 애인이 입대하기 전에 시청으로 끌고 가, 혼인신고서를 내밀었을 때는 대뜸 화를 냈었다. 유행어인 양 결혼하자 했으면서도 전 애인이 같이 살자고 했을 때는 “난 누가 옆에 있으면 그냥 막 화가 나.”하고 다음 날 헤어졌었다. 그런 나였는데, 요즘 나는 조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린 빵이 귀여워서 미칠 노릇이다. 그런 나였는데. 전 애인이 입 맞추려 할 때마다 담배 피우러 가야겠다 한 다음 입에 담배 냄새를 달고 와, 밀어내게 했던 나였는데. 조카에게 내 담배 냄새가 배지 않게끔 언니와 만날 때면 담배 피우는 시간을 대폭 줄이곤 한다. 이 역시 나답지 않았기에 미칠 노릇이었다.

 

여기까지 썼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조카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유효타를 먹일까. 과연 나는 얼마나 오래오래 조카를 귀여워할까. 연애할 땐 6개월쯤 되면 헤어지고 싶어서 몸부림쳤는데, 조카는 벌써 세 살이고, 나날이 귀여워져서 다른 의미로 나를 몸부림치게 한다.

 


(5).

 

앞으로도 나는 조카 제외한 아기들은 내 인생 엑스트라쯤으로 여기고, 결혼에 진심을 담지도 않을 테며, 꾸준히 혼자를 안식처로 삼겠지만. 못돼 먹은 성격도 그대로 또는 더 나빠지겠지만. 언니와 조카만은 그런 내가 종종 안식처에서 나와, 놀러 가곤 하는 여행지이기를. 내가 그 여행지를 계속 아껴 쓰기를. 그런데 문득 왜 여기까지 썼는지 모르겠다. 여태 말과 생각이 참 길었다. 실은 네가 뽀뽀해 준 순간부터 너를 티모시 샬라메보다 사랑하게 됐다는 말만 하고 싶었는데. 마지막에야 말해. 사랑해.

 

네가 나보다 더 커졌으면 좋겠어.

그런 너를 키우는 언니가 그 누구와도 못 견줄 만큼 사랑받기를 바라. 너에게. 형부에게. 웬만하면 모두에게.

 

마지막의 마지막에야 또 말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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