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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16. 2024

5.2 – 죽음의 계보

5 - ‘죽음’과 나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매우 낯선 그 무엇이다. “죽는다.” “죽겠다.” “죽인다.” 등등 우리는 죽는 말을 실없이도 참 많이 떠벌인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뱉는 이런 표현들은 ‘죽음’이라는 말의 본래적인 무게감에 한참 못 미치는, 완화된 화법(표현상으로는 과장된,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약화된 화법)이다. ‘죽음’이 본래의 무게를 힘껏 실어 나를 때,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낯선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이 낯선 의미야말로 온 인류에게 공평한 거의 유일한 조건이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익숙하고도 부담스러운 손님이다. 초대 없이, 느닷없이, 돌연 찾아오는, 그러나 반드시, 어김없이, 기필코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우리가 이 손님을 처음 진지하게 대하는 시점은 보통, 우리 곁에 당연하게 있어 온 누군가가 이 손님의 방문과 함께 곁을 떠나게 되는 그때부터다. 꽤 오랫동안 ‘죽음’을 직접 접해 본 적 없이 살아온 사람도 있다. 반대로 비교적 일찍 ‘죽음’을 접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누군가 떠난다. 점점 더 많이 떠나간다. 살면서 직접 만나는 생명의 숫자만큼, 경험되는 죽음의 숫자 역시 쌓이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불청객을 얼마나 일찍 경험하는지, 혹은 얼마나 가까이서 경험하는지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을 제대로 마주한 사람은, 죽음 때문 삶에 대한 시선 또한 바뀐 사람이다. 멀찍이서 (보통 매체를 통해서) 기척으로만 느껴 봤던 죽음이, 육중하고 우람한 체구를 들이밀며 시야를 사로잡는 그때, 당연하게만 느껴왔던 모든 의미들이 일순간에 희박하고 불안정한 존재들로 돌변한다. 그 뒤로는 삶에 더 무겁고 진중한 의미를 담기 위해, 그 안에 채워 둔 모래알들을 바닥에 쏟아 버리게 된다. 죽음은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좀처럼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관’은 인생관을 수립할 때 제외될 수 없는 항목이다. 진지한 인생관은 반드시 죽음 역시 진지하게 취급할 것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취급할지 역시 신중하게 고려될 문제다. 내 생각에 가장 현명한 접근법은, 처음부터 죽음을 삶의 필수적인 부분과 결말로써 숙고하는 것이다. 내게 이 접근법을 처음 가르쳐 준 텍스트는 바로 유대-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다.*

* 성서는 삶과 죽음을 출발점에서부터 함께 고려한다. 창세기 1~5장(성서의 도입부)은 세상의 시작과 함께 ‘죽음이 인류의 삶에 도입되는 과정’과, 성서가 주장하는 ‘마땅한 삶의 방식’을 중심적인 안건으로 제시한다.


사진: Unsplash의 Cristina Gottardi


성서는 인류가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최초의 정원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며 삶을 유지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생명나무에 대한 ‘차단’ 즉, 정원에서 추방된 결과 인류의 삶에 ‘죽음이 도입되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죽음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생명력의 소모). 4장의 이야기는 조금 더 ‘심화 죽음’을 보여준다. 바로 ‘사람에 의한 사람의 죽음’이다. 인류의 첫 ‘형제’ 사이에서 발생한 ‘질투에 의한 살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죽음은 (질병에 의한 죽음을 ‘생명력의 소모’로 환원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의 죽음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5장의 ‘아담 계보’는 ‘죽음’을 모든 후손의 동일한 결말로써 제시한다.*

* 4장의 계보가 5장과 다른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4장이 ‘살인과 보복 문화의 전파’에 더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A는 몇 살에 B를 낳았고, B를 낳은 후 몇 살을 더 살다가 죽었더라.

 B는 몇 살에 C를 낳았고, C를 낳은 후 몇 살을 더 살다가 죽었더라. C는 … 


이 계보에서 유일한 예외는 ‘에녹의 생애’다. 에녹은 자녀를 낳고 얼마간 더 살다가 실종된다. 계보에 등장하는 모든 생애가 죽었더라를 끝으로 요약되지만, 에녹의 일생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로써 끝을 맺는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21),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2),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23).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

* 24절을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로 옮긴 개역개정의 번역은, 본문에서 “세상”과 ‘세상 아닌 곳’의 구분을 읽어내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좀 저 정확한 번역은 “없어졌다.” 정도일 것이다. 공동번역개정의 번역은 원문을 더 잘 반영한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위 구절에서 굵게 표시하지 않은 부분은 이 계보에서 돌연변이처럼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이 ‘실종사건’은 다른 모든 이들의 결말인 ‘죽음’과 대비된다. 위 구절은 명백히 에녹의 특별한 ‘삶의 방식’이 그의 특별한 ‘결말’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신과 동행하는 삶’ 때문에 ‘신이 따로 데려가’ 버렸다는 것이. 이 ‘데려감’과 ‘죽음’의 비교 구도는 에녹의 ‘실종’을 ‘연장된 생명’으로 읽게 하는 문학적 장치다.


삶의 한계(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낳는다.


1. 죽어도 좋을 만큼 의미 있는 삶?


첫 번째 질문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와 주제 의식과 의견을 공유한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은 명문고에 새로 부임한 교사다. 그는 제자들이 죽도록 경쟁하며 정해진 경로만을 따라 청춘을 ‘낭비’하는 모습에 경악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로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취한 행동은 다름 아닌, ‘죽음의 계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학교 역사관에 데려가, 그곳에 전시된 선배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 속 선배들은 먼저 ‘망자(亡者)가 된 청춘들’이다. 그 뒤를 잇는 제자들에게 키팅은 이렇게 속삭인다. “카르페 디엠(현재를 붙잡으라).” 오늘의 삶이 언제까지고 당연하게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키팅 선생 역시 제자들에게 삶을 가르치기 위해 ‘죽음의 계보’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계보를 해석하는 방식은 성서의 방식과 차이를 보인다. 키팅 선생의 해석은 ‘언제라도 끝날 수 있는 삶일진대, 의미 있게 살려거든 (타인이 정해준 경로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충분히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성서는 이러한 키팅의 해석을 비웃는다. 사실상 ‘한정된 생애 안에서 추구될 수 있는 모든 의미와 꿈’을 비웃는 편이다. 다음은 성서에서 ‘지혜’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전도서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생각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장 2~4)”

  …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6~17)”*

* 물론 창세기와 전도서는 각기 다른 책이다. 이 책들을 쓴 저자들 역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책을 한 뭉치로 엮어 낸 고대 유대인들은 두 저자가 삶과 죽음에 대하여 같은 의견을 취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관점은 확연히 대비된다. 그러나 결국 영화도, 성서도 ‘죽음’이라는 인생의 한계 위에 삶을 위한 전략을 쌓아 올린다.


키팅 선생은 ‘망자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속삭인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붙잡으라.’ ‘후회 없는 삶을 택하라.’ 성서도 우리에게 ‘죽음의 계보’를 제시하며 다그쳐 온다.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을 따르라.’ ‘세상 너머의 세상을 택하라.’


인간의 삶은 방황과 모험의 연속극이다. 불안과 고통을 끊임없이 오가며, 안개 같은 미래를 향해 손 뻗는 맹인의 삶이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팔을 휘적거리며 앞을 더듬어 보아도, 또 다른 불안과 새로운 고통만이 손에 잡힐 뿐이다. 확실한 의미를 구걸하는 자에게 내일이 던져주는 실마리는 오직 확정된 나의 죽음’ 뿐이다.


‘죽음이라는 한계’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보람 삼아 살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삶의 철학을 전도시켜 버린다.


‘죽음 앞에서도 유지되는 보람은 무엇인가?’


‘죽음은 정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가?’


‘죽음은 진정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모든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죽음조차 죽이지 못하는 의미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이어지는 글 키에르케고어와 니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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