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이 일은 내가 살면서 겪었던 일들 중 가장 희한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내가 가진 이야깃거리 중에 딱히 글로 쓸 만큼 획기적인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필요한 만큼만 나 자신에 관해 묘사해 보려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 나는 모 대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학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이 황당하고도 허무한 이야기에 불필요한 신뢰도를 가중하고 싶지 않아서다. 사람들은 희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무턱대고 그것이 믿을만한 이야기가 맞는지부터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근거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전혀 상관없는 요소가 이야기의 신빙성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근거를 찾는 본능이 작동시키는 것은, 어떤 이야기가 의심해 볼만 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빨리 그 이야기를 믿고 싶어서인가?
아무튼 나는 이런 본능이 학교의 명성과 결부되는 것은 싫다. 나는 이런 허깨비 같은 보고report 뒤에는 아무런 병풍도 세워두고 싶지 않다. 학교의 권위 따위,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는 일말의 개연성조차 없다. 게다가 나는 과도하게 이목을 끌고 싶지도 않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누군가 이 글을 통해 나라는 실존 인물에게 도달한다면, 매우 피곤할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Sixteen Miles Out
그 시절 학교에서 나는 단지 여러 직원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대학교에서 교직원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존재감 따위는 불필요했다. 덕분에 나는 끼릭끼릭 잘 굴러가는 부품을 연기하는 것 만으로 이 집단에 이질감 없이 숨어들 수 있었다.
숨어든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설명하자면 ‘은닉’은 나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타인들의 세계에 섞여 드는 일에 조금 고역을 느끼는 타입이었다. 나는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 보통의 사람들과는 살짝 어긋나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음의 구조가 달랐던 것이다. 한 30년쯤 관찰해 온 바에 의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그릇’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시간이 쌓일수록 거기에 뭔가 자꾸 담기고, 또 그렇게 담아낸 것들을 어딘가에 쏟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내 것은 아마 ‘뜰채’ 같이 생겼을 것이다. 비슷한 나이의 인간들이 ‘담고, 쏟기’를 수십, 수백 번 되풀이하는 동안, 나는 세월이란 것이 그저 유유히 나를 스쳐 가도록 승인해 왔다. 구멍이라도 뚫려 있지 않다면, 이런 현상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오해는 말도록. 이 ‘구멍’은 상처가 아니다. 내 마음에 ‘담수’라는 현상은 없었고, 따라서 ‘누수’에 대한 걱정도 불필요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남들에게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고, 나에게 쉬운 것이 남들에게는 부러운 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사서가 되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학교의 철학과 학생이었다. 나름 이름난 학교인지라, 유망한 전공을 선택했다면, 사는 데 조금 더 유리했을 것이다. 뭐 아무래도 좋다. 유리하지 않다고 한들, 그 선택으로 내가 불행해진 적은 없었다. 이루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가까워질 것도, 멀어질 것도 없었다. 남들이야 고리타분하고 무용한 전공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내 선택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대학교라는 곳은 ‘있는 집’ 자제들이 별안간 흥밋거리나 탐구하다 자연스럽게 상류 사회로 흘러들기 위해 거쳐 가는 경유지가 아니었던가. 간혹 나처럼 ‘없는 놈들’이 어떻게든 뜻 한번 크게 펼쳐보려 섞여 들기도 했다지만…. 이 또한 옛말이다. 내가 경험했던 대학교는 아카데미도, 사교계도 아닌, 직업 훈련소에 불과했다. 대학교 졸업장 정도로는 ‘가방끈’의 ‘가’ 자조차 입에 올리기 어려운 세태였던 것이다.
다만, 무엇을 공부했느냐는 차이를 만드는 요소로 남아있었다. 과거에 비하면 전공과 무관한 직종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점차 많아지기는 했다만, 역시 사람들은 아직 ‘뭘 배워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할 수 있는- 시점에 와서야, ‘뭐가 되고 싶은지’, ‘뭐가 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편이었다. ‘꿈’과 ‘흥미’를 좇을 것인지, 잠자코 ‘현실’에 눈 떠야 하는지의 문제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선택지가 눈에 보일 때, 사람은 불안해진다. 그렇게 보면, ‘자유라는 것도 일종의 억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세상 좋아졌다’면서, ‘고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렇게 천진난만한 생각이 가능한 사람들이 나로서는 오히려 부럽다.
선택지가 있는 편이 선택지가 없는 것보다 나은 점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선택지조차 모종의 착시 현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지가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선택지들을 마음 놓고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지위가 보장된 길이나 돈 만지기 좋은 계열, 아니면 흥미나 ‘꿈-본위적인’ 선택지 같은 것들은 하나같이 배부른 소리였다. 좋은 길은 결국 좁은 길이었던 것이다. 학업 성취도나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 따라주지 못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니던가. 대다수의 개인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만만한 분야를 고르고, 만만한 파이프를 통과해서, 사회 속 저 만만한 곳 어딘가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차라리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니고, 죽도 밥도 아닌, 흐리멍덩한 존재가 살기에 더 편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다. 고르고 싶은 간절한 선택지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고르지 못하는 선택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망한 쪽을 고르자니, 도착지라고 생각되는 포지션이나 메리트보다, 계속 그렇게 유망한 상태로 있기 위해 쏟아야 하는 정성이 더 커 보였다.
고등학교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우수했다고 해야 온당할 것이다.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은 내게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문제 속에 답이 있지 않은가. 학비나 생활비도 내게는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우리 집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뜻밖에 얻어걸린 행운 덕분에, 경제적인 문제는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사진: Unsplash의 m.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집에서 받는 용돈의 사용처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런 답 없는 문제들이 더 어렵게-흥미롭게- 느껴진다. 용돈 쓰는 일이 어려웠다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오해 말도록.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었다. ‘뜻밖의 행운’ 덕분에 겨우 내 한 몸 건사하여 독립했을 뿐, 여전히 우리 집이 부유해진 것은 아니었다.
‘뜻밖의 행운’이라는 것은 역시 내 ‘용돈 사용처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부유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차고 넘치는 용돈’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 부모님은 용돈을 주실 때, ‘학업에 필요한 돈’ 즉, 교재나 학용품을 사기 위한 지출과 ‘자유로이 쓸 돈’을 구분하셨다. 아마 내가 밖에서 ‘돈 문제’로 고뇌하느라,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애쓰신 것이겠지. 하지만 나처럼 ‘희구 없는’ 인간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은 쪽이 오히려 더 피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 큰돈을 주신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구미조차 당기지 않았지만-오히려 사치를 부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금액이었다. 게다가 시답지 않게 오락거리에 탕진하는 취미도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결국 매달 받는 용돈을 제때 쓰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히려 부모님 쪽에서 ‘돈 좀 쓰라’며 다그치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쓰이지 못한 기회들은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목돈이 되었다. 자그마치 400만 원이다. 너무 귀엽게 생각할 필요 없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400만 원은 분명 거금이었다.
막상 ‘거금’을 손에 쥐니, 이제는 돈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돈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지 않았던가. 고심 끝에 나는 당시 유행하던 한 SNS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400만 원 전부를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비로소 나는 그 돈을 다 ‘까먹을 수 있었다’.
입시 준비로 한창이던 3학년 초 어느 날, 기사 하나가 눈에 들었다. “[ 세계 최대 규모 SNS 플랫폼 IRONY, 첨단 AI 기업 YOUInterface와 인수합병 결정! 뉴욕 증시 주도주 드디어 바뀌나? ] …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용자를 보유한 SNS 기업, IRONY가 AI 테크의 선두 주자 YOUInterface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 향후 IRONY는 상호명을 A.X.A(ARTIFICIAL X ATTACHMENT)로 바꾸고, YOUInterface의 플러그인을 도입한 새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밝히며….”
마침 대학교에 입학해야 했기에-학비와 생활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나는 잊고 있던 MTSMobile Trading System의 호가창을 열고 수익률을 확인했다. 혹시나 했지만, 당연히 IRONY의 주가는 ‘소폭 상승’했을 뿐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며칠간 주가는 가파르게 하락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는 이 뉴스를 무심하게 지나치고 다시 시험 준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입시가 끝나갈 무렵, 나는 우연한 계기로 기사에서 언급한 ‘A.X.A의 새 서비스’가 생각보다 빨리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입을 포기했던 몇몇 친구들이 이미 그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류, 면접 등 번거로운 입시 절차가 내 손을 떠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A.X.A의 세상이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A.X.A를 통해 만든 프로필을 사용하고, A.X.A를 통해 피드와 게시글을 작성하며, A.X.A의 매칭으로 서로 만나기 시작했다.
이후 철학과 입학을 결정한 뒤, 나는 A.X.A 주식을 실현한 돈으로 입학금과 추후 4년 간의 등록비를 모두 지불할 수 있었다. 당시 실현했던 A.X.A 주식의 수익률은 무려 1,000%였다. 물론 이 정도 수익만으로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가 비약적으로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주식으로 얻은 돈은 대부분 -부모님의 동의 하에-내가 독립생활을 시작하는 밑천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언급한 ‘뜻밖의 행운’이었다.
왜 철학과에 입학했는지 묻는다면, 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다시금 넓어져 버린 선택의 폭 안에서, 그나마 거부감이 들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철학과 이외에도 같은 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 최종 합격했었다. 국어국문학과는 별다른 내적 동기 없이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지원한 것인데, 그는 내가 교직을 이수한 뒤 임용고시를 치르면 자신처럼 교사가 될 수 있다며, 거의 강매하듯 선택을 권유했다. 하지만 담당 과목이 국어였던 담임교사의 수업이 그다지 나를 고양하지 못했기에, 그 권유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나는 해답이 없는 텍스트를 두고, 특정한 답을 유도하게 만드는 직업은 갖고 싶지 않았다. 교직 이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국어국문학과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름 글을 읽고 쓰는 일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에는 국어국문학과와 담임교사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철학과를 선택한 것을 딱히 후회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잘 된 것이었다.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일은 정말 신물 나는 일이다. 철학은 나에게 안식처였다. 물론 이 안식처조차 내게 부푼 꿈과 뜨거운 열정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의미도 잘 담아내지 못했던 내 마음을 위해 이보다 더 편안한 쉼터는 없었다. 철학은 누구에게도 ‘답’을 맞추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사진: Unsplash의 �� Janko Ferlič
다시 대학 도서관 이야기로 연결해 나가자. 대학 시절에는 종종 나에게 왜 철학을 선택했냐고 캐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철학을 배워서 나중에 ‘무엇이 될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당장 이 안에 머무는 것이 좋았을 뿐인데 말이다. 졸업이 가까웠던 시점부터 그들은 더욱 공세적으로 내가 무엇이 되려 하는지 캐물었다. 게다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의 수가 더 많아지기도 했다.
나는 결국 견디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작가’의 꿈을 떠벌이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그때부터였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어느 날 내 안에서 꿈 세포가 무럭무럭 자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냥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뭐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저들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꼭 되어야 한다느니’, ‘뭐라도 해야지 않느냐느니’ 온갖 폭압적인 단언으로 나를 짜부라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작가’라는 그럴듯한 말이라도 지껄여주면, 그제야 ‘나중에 배고프겠다느니’, ‘먹고살기 어렵겠다느니’ 별안간 횡설수설하다가 재미 다 봤다는 듯 시끄러운 질문을 그치는 것이었다.
당연히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작가’가 되려는 시도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무엇이 되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서’가 된 것은 그저 그곳에 계속 체류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내게 제기했던, ‘뭐라도 해야지’ 식의 현실적인 체념과는 달랐다. 현실은 따분했지만, 현실은 따분했으며, 내 안에는 현실과 겨룰만한 그 어떤 이상도 없었다. 다만 나는 재학 시절에 학교 도서관을 매우 좋아했다. 도서관은 내게 ‘공간화된 철학’이었다. 도서관은 잠잠했다. 그곳에는 나에 관한 질문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없었다-저들은 ‘답 없는 질문’마저 마치 답안지라도 있는 것처럼, 뻔뻔하게 쏘아붙이곤 했다-. 도서관에서는 나만의 답 없는 질문들이 방해 없이 마음껏 메아리칠 수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나는 책을 읽는 일 이외에 두어 가지 유희거리를 즐겼다. 하나는 책을 읽으러 온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책을 읽는지 관찰하면, 그 사람의 관심사나 사고방식, -조금 과한 망상을 보태자면-살아가는 방식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학 도서관에서 읽히는 책들은 다소 한정적인 편이었다. 주로는 과제나 시험공부에 필요한 교과서나 논문, 더러는 취업 준비를 위한 교재나 실용 서적 등이 읽혔다.
하지만 종종 눈에 띌 만큼 희한한 책을 꺼내오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비밀결사의 세계사》나 《생각하는 전투기술 이야기》 같은 독특한 책들을 빌려 가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특이한 서적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나처럼 ‘일반 범주’와 거리가 먼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오곤 했다. 혹시 정말 비밀결사의 내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거나, 매일 같이 남들 몰래 ‘컴뱃 스킬’을 연마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이런 ‘관찰’이 일종의 ‘관음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관음증이라는 말은 다소 음흉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만, 누구나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큼 소소한 관음증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죄 없는 자만 나서서 돌로 칠 것.
첫 번째 유희도 특이하게 느껴지겠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할 두 번째 유희에 비하면, 오히려 이전 것은 약과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종종 아주 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있었다. 그런 날에는 그 건물에 –직원들을 제외하면-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 친분이 쌓인 사서에게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도 도서관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사서들은 몇 가지 당부하면서도-‘필요 이상으로 서가를 건드려서는 안 되며, 문단속은 두 번 세 번 철저히 해야 한다.’ 등- 여전히 망설였고, 나는 그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복창하며 엄숙히 선서해야 했다. 충분히 친분과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마치 출근하듯 매일 규칙적으로 도서관에 와서 사서들이 퇴근할 때까지 남아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서가를 정리할 때 그 작업을 애써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런 성가신 요청이 승낙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최소한의 조명만을 켜둔 채, 서가의 숲을 산책하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고대 소요학파의 구성원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뚜벅뚜벅 스스로 내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온 우주에서 나만이 할 것 같은 생각들의 연쇄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로봇청소기처럼 사이사이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서가에 꽂혀 있는 책 몇 권이 시야를 사로잡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 책을 꺼내 들고 자리에 앉은 채 통으로 읽어 버리곤 했다. 어떤 날은 깜빡 잠이 들거나, 너무 두꺼운 책을 골랐던 나머지, 아침에 출근하는 사서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요학파 놀이’가 길어지는 날이 점점 많아지자, 사서 한 명이 일찍 출근해 도서관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 사서는 유독 나에게 친절했다. 도서관을 전세 내듯 사용하겠다는 미친 부탁도 그 사서에게 처음 이야기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내가 사서 자격증을 취득해서 대학 도서관에 취직하게 된 것도 그녀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아주 가끔 ‘직업 정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른 시각에 출근하곤 했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내가 유희를 즐기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랬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내 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끼는 날도 있었다. 아마 그녀가 일찍 출근하면 나눠주는 소소한 간식거리를 기다렸던 것이겠지. 내가 먼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 적이나, 의도적으로 추파를 던진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왜 이렇게 나에게 친절하게 구는지’ 궁금해질 때면, 던지듯이 툭툭 질문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동문서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그녀가 되돌려 주었던 여러 엉뚱한 대답 중 하나가 나를 대학 도서관 사서의 길로 이끌었다. 그날도 내가 질문했던 것은 친절의 이유였지만, 그녀는 나에게 “사서가 되면,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된다”는 엉뚱한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아마 내가 사람들을 은밀히 관찰하는 것처럼, 그녀도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해부했던 것은 아닐까.
졸업 후 사서 자격을 갖추고 돌아오기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학교에 돌아오면서 내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가 아직도 사서 일을 하고 있는지였다. 하지만 내가 직원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이곳을 떠나고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도 ‘무엇인가 되기 위해’ 사라진 것이리라. 그녀도 결국 보통의 사람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법이니까….
오래된 얘기는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지루한 편이라 어디에서든 잘 꺼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면, 이 정도의 자기소개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