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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예민하긴 01화

1화. 보고서에는 화살표를 삽입하세요

by 괜찮은사람

"서진 씨는 왜 화살표를 꼭 ‘->’ 이렇게 키보드로 만들어 써요?
여기 ‘삽입’–‘기호’ 들어가면 진짜 화살표 있잖아요?
그게 더 보기 좋고, 덜 성의 없어 보여요."


5시 48분이었다.

퇴근 두 시간 전이 아니라, 정확히 12분 전.
최미정 팀장은 늘 그 타이밍에
무언가를 '우연히' 발견하곤 했다.


"아… 네, 그건 제가 미처…"


한서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멈칫했다.
보고서. 내용은 그대로였고,
단지 표 옆에 MS워드 삽입 탭의 ‘진짜 화살표’가 없다는 거였다.


"요즘은 시각화가 중요하잖아~
그냥 보면 좀… 급하게 만든 느낌이랄까?"


말은 웃으며 하지만,
내용은 시비였고
의도는 지적이었다.


서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심장은 내려앉았다.


“네. 금방 수정해서 다시 올릴게요.”

"응~ 고마워요.
다음부턴 초안이라도 그런 건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다음부터.
초안이라도.

챙겨줬으면.


그날, 서진은 퇴근을 46분 늦췄다.
그리고 회사 근처 조용한 식당에서
차가운 소바를 시켰다.
얼음이 둥둥 뭉쳐진,
아무 감정도 없는 국물과 면.


그래, 차라리 시리게 식혀버리는 게 나았다.

집에 들어가면
오늘도 뜨끈한 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4월 초.
영상을 웃도는 날씨에 꽃들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오늘도 보일러 다이얼을 돌렸다.


새벽에 들어온 서진은
실내온도 28도를 찍은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그는 50년 결혼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난방비를 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일러를 트는 손은 늘 아빠의 몫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트냐고.
서진만이 그 질문을 마음속에 백 번쯤 되뇌었다.

그는 늘 조용히 켰고,

그녀는 늘 조용히 끄고,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이 집의 대화 방식이었다.


그녀는 다 안다.
누군가 말없이 저항하는 방법.
누군가 책임지지 않는 방식.
그리고 그게,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




예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아무것도 참고 있지 않다.

진짜 예민한 건,
참고 있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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