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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목격자

by Unikim

며칠 후,
순이는 뒷산 너머 바람 부는 구릉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긴 고무신, 꾹 눌러쓴 검은 모자.....
조용히 허리를 굽혀 나물을 캐고 있던 그 여자.....
얼핏 스치는 기억.....
‘순남이....?’

"순남이.... 맞지?"

순이의 말에 여자는 움찔했다.
그러고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순남이는 철썩 엿공장에서 비서일을 맡아보던 사무원이자 현수의 식솔 중 하나였다.

“어머나.... 순이 애기씨....”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눈엔 오래된 두려움과 무거운 말들이 얽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순남이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 공장 뒤편에서.... 이상한 걸 봤어요.”

순이의 눈이 커졌다.

“누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윤석 사장님 문서를 들고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 조선 사람이 아니었어요. 일본 헌병 옷을 입고 있었어요.”

“뭐라고....?”

“사장님이 쓰러지던 그날....
사람들이 몰려가기 전에, 나는 먼저 봤어요.
피가..... 사장님 손에서 뚝뚝 떨어졌어요.
근데… 아무도 그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를 안 봤죠.”

순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그 사람이.... 분명 그 문서 중 하나를 주워서 품에 넣었어요.”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

순남이는 망설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자꾸,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순이 애기씨도 조심해요.
사장님이 남긴 건 그냥 종이가 아니에요.”


순남이는 고개를 숙이고 들고 있던 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그 이상은.... 저도 겁이 나요.
그날 이후로 공장 뒤로는 안 갑니다.
그 문서, 애기씨가 들고 있으면.... 조심하세요."

“순남아.... 잠깐만. 혹시, 혹시 그날.... 윤석 씨 책상에서 문서 꺼낸 사람, 너 아니었어?”

순이의 물음에 순남이는 숨을 멈춘 듯 섰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전 그날 사장님 방엔 가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누가 다녀간 흔적은 있었어요. 창문 밖 눈 위로 발자국이 남아 있었거든요.”

순남이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채로 순이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발자국, 두 겹이었어요.
하나는 장화를 신은 발, 하나는 헌병단 구두 같았어요.
거기까지 봤어요. 저.... 이제 가볼게요.”

그녀는 재빨리 뒷길로 사라졌다.

[그날 밤, 순이의 방]

순이는 불을 끄지 못한 채, 손에 쥔 문서를 다시 펼쳤다.
먼저 명단록을 보았다.
그 이름들 끝에 ‘김윤석’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건.... 독립운동 자금을 위한 공장 명의 양도...?
윤석 씨는..... 이걸 위해.......”

순이는 손가락으로 윤석의 이름을 쓸어내렸다.

“그 사람은.... 나라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던 거야…
근데… 왜, 왜 이렇게 죽어야 했던 거야…”

[다음 날, 또다시 나타난 순남이]

"애기씨, 나.... 잘못했어요."

순남이는 허겁지겁 순이네 집 앞에 나타났다.
그 손엔 무언가가 움켜쥐고 있었다.

"어제 말 못 한 게 있어요.
그 사람, 그날 창고 옆에서 뭔가 묻고 있었어요.
무서워서 못 다가갔는데 오늘 가보니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펼쳤다.

“이건… 윤석 사장님 도장이에요.
찢어진 문서 중 하나랑 같이 땅 속에 묻혀 있었어요.”

도장엔 아직도 흙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윤석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었다.

순이의 눈가가 떨렸다.
그 도장은 윤석이 자주 사용하던 것으로 공장 계약서나 명의 양도에 늘 사용되던 도장이었다.

“…그 사람이 왜 이걸 묻었을까?!! 숨기려 했던 걸까… 지키려던 했던 걸까…”


순이는 그 도장을 가만히 쥐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느껴지는 나무의 감촉,
수십 번, 수백 번 윤석이 손에 쥐고 있었을 물건이었다.

‘이 도장으로… 그는 지키려 했던 거야.’

순이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그녀가 필사해 둔 문서 두 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노트 한 권.

그 노트는 윤석의 수첩이었다.
아직 다 풀지 못한 필체,
그리고 맨 끝장에 적힌 단 한 줄.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이 쏟아졌다.
순이는 조용히 노트를 덮고 문서 중 한 장을 다시 꺼내 펼치려는 순간,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작은 쪽지가 불쑥 떨어졌다.

"거래 장부는 뒷창고 장독대 아래."


'갑자기 이 쪽지가..... 분명히 없었는데....'


[다음 날 새벽 – 뒷창고]

순이는 아직 어두운 새벽, 조심스럽게 장독대 쪽으로 향했다.
흙을 파자, 낡은 철제 상자가 나타났다.
덜컥 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뚜껑을 여니…

그 안엔 두꺼운 장부가 들어 있었다.

거기엔 수많은 돈의 흐름 그리고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다.

'이 이름은… 공장 직원들 이름…
근데 이 사람, 분명 작년에 해고됐는데 왜 계속 월급이 지급된 걸까…'

순이는 장부에 빨간 잉크로 표시된 항목들에 눈을 떼지 못했다.

"윤석 씨는… 누군가에게 공장을 잠식당하고 있었어.
그걸 알고, 되찾으려고 했던 거야…"




그 시각 멀지 않은 거리에서 누군가 망원경으로 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담배 연기 그리고 번들거리는 제복.....

“그 여편네… 너무 깊이 파고드는데.”

그는 무전기를 들었다.
“순이란 여자를… 조용히 처리해. 문서도 같이.”




순이는 조용히 문서와 장부, 도장을 꺼내 작은 보자기에 싸매어 가슴에 안았다.
이걸 가지고 갈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의광회 그곳을 찾아가야 해.'


순이는 가만히 도장을 바라보며 윤석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공장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소. 하지만 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꼭 살아야 하오."

그때 그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순이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조금씩 흘러들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순간 순이의 결심은 더욱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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