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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림자 속 이름

by Unikim

“선생님께서 남기신 겁니다.” 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얇은 쪽지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마루 끝에 앉아 있던 순이가 손을 천천히 들어 그것을 받았다. 종이를 펴기도 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차가운 글자 셋. 그 이름은 지난번 도현이 건넸던 쪽지에도 적혀있던 바로 그 이름.... 도현에게 쪽지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순남도, 영이도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순이의 눈치를 살폈다. 바람 한 줄기조차 얼어붙은 듯 방 안은 정적에 잠겼다.


“윤석 선생이 마지막까지 주시하셨던 이름입니다.”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확신은 아니었다고 하셨지만... 공장에서 정보가 새어나가기 시작한 시점과 움직임이 겹쳤습니다.”

"그 사람이...."

영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장 회계 기록에서 본 적 있어. 퇴사자 명단에 있던 이름들...... 근데도 계속 월급이 나가고 있었어. 그리고 쪽지 속의 그 사람..... 그 사람의 문서 주소 중 하나가 일본 쪽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도.....”

순남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랫동안 그녀가 신뢰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꺼냈다. 윤석이 남긴 필기였다. 그 안엔 단편적인 숫자들, 주소 목록, 그리고 누군가의 이면을 암시하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윤석 선생은 공장이 서서히 잠식되고 있다고 느끼셨어요. 수리비가 부풀려지고, 자재 수량이 맞지 않고, 퇴사한 사람들에게도 급여가 계속 나가고... 내부 누군가가 조직을 갉아먹고 있다 하셨어요.”


순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잠든 춘식이 방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설강회 안에 그 자의 손길이 닿아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순남이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하지만 적어도 의광회 내부에 그가 있다는 건… 이제 부정할 수 없어요.”

“이름을 공개해야 할까요?”


영이가 물었고, 도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 윤석 선생의 죽음도, 이 문서들도 헛되지 않아요.”


순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안에 쪽지를 쥔 채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믿는 척하면서 의심하고 도와주는 척하면서 파고들고.... 우리가 믿던 이가 밀정이리라는 의심을 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몇 명의 밀정이 더 있는지 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밀정을 드러내기 전까진 그 누구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믿을 수도 없고 또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린 더욱 면밀하게 지켜보고 또 일을 추진해야 하며 뭉쳐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구도 쉽게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날 밤, 순이는 잠든 춘식 옆에서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한 채, 윤석이 남긴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그의 싸움을 이어갈 결심을 다졌다. 참 힘들고 가슴 아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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