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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설강화

by Unikim

새벽안개가 자욱한 골목길을 순이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품속엔 필사해 둔 문서 두 장이 들어 있었고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의광회가 비밀리에 운영한다는 약방을 향하고 있었다. 약방은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한약국이었으나 그 안쪽의 작은 밀실은 독립운동의 거점 중 하나였다.


문을 열자 종업원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순이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생강모과탕이 필요해요. 두 재기만."


그 말에 중년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조용히 안쪽으로 그녀를 안내했고, 순이는 문서가 들어 있는 천 보자기를 가슴에 품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의광회의 실무자 중 한 명이었다.


"저.... 혹시 김윤석 씨를 아시나요? "

"누.... 누구시지요? 누구 시기에 그분을 아십니까?"

"저.... 이거...."


순이는 순남이가 써 준 편지 한 통을 내놓았다.


"아... 예."


그는 받은 편지를 쭉 읽더니 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윤석 선생님의 부인되십니까?"

"예, 제 남편의 이름이 김 윤석입니다."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늘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 주셨고 우리에게 매번 큰 힘을 보태 주셨습니다. 그 용기와 신념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건 걸요. 저희가 선생님께 받은 은혜가 큽니다.

또한 유고를 전하러 이곳까지 와 주신 그 마음 역시 깊이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뜻과 희생은 저희 모두가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순이는 대답대신 눈물만 글썽거렸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과 마음, 부디 전해주시지요. 소중히 받들겠습니다."


순이는 가슴에 품고 있던 문서를 내밀었다.


"저... 이거...."


도현은 순이가 내민 문서 두 장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들었다.


"아니 이것은...."

"아시는 것입니까?"

"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게시는 겁니까?"

"활동하시는 분들의 명단이 아닌지요?"

"맞습니다.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이건 명단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건.....

우리 공장 문서인데..... 그 명의를 변경해 놓았던 것 같아요.

여기 약방 주인분 명의로 변경되어 있던데요...."

"예, 아마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하셔요..."

"이건 제가 필사를 한 것입니다. 원본은 찢겨 있고 피가 뒤범벅되어 있어서 풀을 쑤어 식힌 풀로 붙여서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문서들은 그 이가 죽던 날 책상 위에 찢겨져 있었는데 피로 얼룩진 채였습니다."

"그 말씀은......"

"예.... 아무래도 저들이 의광회에 대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예..."

"그리고 또 하나는 문서가 찢어져 있는데 그 효력이 있을까요? 저들이 이 문서를 인정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바깥양반은 이 공장이 독립 운동하시는데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되길 원하셨던 거 같습니다. 부디 잘 쓰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부인.... 선생님의 마지막 뜻을 이렇게 전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반드시 그 뜻을 잇겠습니다.”
"이건... 이건 윤석 씨가 남긴 유언장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목숨을 잃기 전까지도 이걸 지키려고 했던 거 같아요. 꼭 좋은 일에 써 주세요."


날카로운 눈매에 단정한 외모를 가진 도현은 문서를 조심스럽게 다시 살폈다. 그리고 그는 명단과 공장 문서를 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이 명단에 있는 이들은 우리 쪽 인사들 이름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문서를 보면 이 공장 하나는 명의 이전을 마쳤네요.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새어 나갔다는 건... 내부에 누군가 있다는 뜻입니다."


순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윤석 씨를... 죽게 만든 게, 내부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명단, 잘못 쓰이면 모두의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순이는 두 손을 모았다. "부탁드릴게요. 윤석이의 억울함을, 그리고 그가 지키려 했던 걸... 헛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고인의 뜻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귀한 발걸음 감사합니다."


그 순간, 문 너머로 인기척이 났다. 그는 손짓으로 순이를 밀실 한편에 숨겼고, 잠시 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모과탕 두 재기 달라니까 왜 안 가져와!"


거친 목소리, 그리고 이상한 시선. 의심 가득한 눈으로 약방 안을 훑던 남자는 결국 돌아섰지만, 그가 나가고 난 후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긴장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밀정입니다."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근방에도 밀정이 섞여 다닙니다."


순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씀 주세요. 미력하게나마 도움드리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두 분께서 안팎으로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시고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며칠 후,....

순이는 의광회의 연락을 받고 다시 약방을 찾았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만난 도현 말고도 의광회의 다른 간부들 몇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한복 차림의 중년 여성도 있었는데, 그녀가 이 조직의 실제 지도자라 했다. 그녀의 이름이 정민정이었다.


정민정은 순이의 손을 잡았다.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윤석 선생님은 끝까지 대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남긴 흔적을 우리가 끝까지 이어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시는데 별 일은 없으셨지요?"

"예... 약을 사러 온 것이니까요...."

"고맙습니다."

"오늘 연락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 다름이 아니라 부인께서 중간에서 우리의 연락 체계를 좀 이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순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무얼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쪽지나 물건을 주고받을 때 부인을 통해 이어질 수 있게 해 주셔요."

"알겠습니다. 물레질과 옷을 짓고 수선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중간 역할을 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도와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우리 조금만 더 함께 힘을 내어 보아요. 국제 정세가 예사롭지 않아요. 곧 일본이 망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곧 우리나라도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을 할 겁니다. 조금만 더 분발해 보아요. 우리.."

"예. 꼭 그런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이건 뭔가요? 일본 헌병으로 보이는 사람이 땅에 묻어 놓았던 문서입니다.

혹시 아직 명의 이전이 되지 않은 문서이지만 이것이 있으면 되찾아서 좋은 일에 쓸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꼭 좋은 일에 쓰여야지요.

선생님의. 일은.... 생각만으로도 참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모두 계획된 일이었던 거 같아요.


저들이 우리 모든 재산을 몰수해 갔어요. 무슨 빚이 있다며 빼앗아 갔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그 모든 게 우리의 재산을 뺏고 독립운동 자금의 지원을 막기 위한 거짓 명분들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중일 전쟁의 구호물자 조달을 위해 빼앗아 간 것일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 이 문서의 공장을 이미 저들이 임으로 일제의 재산으로 복속시켰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난번 필사해 드린 문서는 훼손이 심해서 필사본을 드렸습니다만 이건 명의 전환을 하시려면 원본이 필요할 거 같아서 원본을 직접 가져왔어요. 일이 진행되면 그때 도장은 찍어 드릴게요."

"저.... 혹시 지난번에 주신 문서 원본은?"

"그 원본도 필요하신가요?"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 문서가 노출되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서 여쭈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문서가 저들 손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곤란해지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 잘 보관해 주셔요. 부인께서도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미 그 명단에 적힌 분들은 저들에게 노출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조심들 하셔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 선생님만 찾아가고 아직 우리를 찾지 않는 건.... 달리 생각하고 있는 거 일 수도 있습니다."

"달리라니요?"

"의광회는 지금 청년산업진흥회로 등록되어 있는 합법적인 문화 단체입니다. 그래서 교육, 청년 계몽, 공장 운영을 통한 사회적 기여 같은 활동을 하는 존경받거나 영향력 있는 단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달, 문서전달, 사보타주 계획 같은 걸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고요. 일부 구성원만 이 실체를 알고 있고 나머지는 겉모습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약방으로 위장한 우리의 밀실에서 중요한 모임을 진행하고 있고요. 그러니 저 명단을 보았다고는 하나 독립운동 구성원으로는 아직까지 생각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심하면서 일단 지켜보시지요?"

"아~ 상당히 밀도 있게 짜인 조직이군요.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날 밤, 순이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 현수 그리고 동생 영이와 긴 대화를 나눴다. 춘식이는 이미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게... 너 혼자 할 일이겠나. 우리도 같이 해야지. 네 아버지도, 네 남편도, 이런 날을 위해 살다 간 거야."


현수의 말에, 영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실은 나도 형부의 일을 돕고 있었어."

"응? 무슨 일?"

"형부가 독립운동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내가 도왔어. 돈에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정보가 새어 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돕게 되었어. 도과 오빠랑 지만이 오빠 그리고 내가 주로 맡아서 하던 일이야. 언니 걱정할까 봐 형부가 언니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랬구나!!! 나라의 중요한 일을 나 몰라라 할 사람이 아니지. 니 형부....

고맙다. 영이야... 함께 해 줘서....."


세 사람은 촛불 아래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이들은 의광회의 여성조직인 '설강회'를 조직하고 이에 몸담게 되었다. 설강회는 의광회 산하에서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정보 수집과 연락, 물자 조달 등을 맡는 비밀 단체였다.


며칠 뒤....

도현이 급히 순이의 집을 찾았다.

"지금 시청 내에 내부 정보가 흘러나갔습니다. 공장 문서에 있던 주소 중 하나가 일본 헌병대에 덜미를 잡혔습니다."

순이는 놀라며 입을 막았다. "그럼, 그 공장은..."

"이미 수색이 들어갔습니다. 다행히도 우리가 먼저 사람들을 뺐습니다만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합니다."

순이는 윤석의 죽음을 떠올렸다. 피 묻은 손, 찢긴 문서, 그리고 붉은 손톱 밑의 흔적. 도무지 떨칠 수 없는 의문들이 스멀스멀 다시 떠올랐다.

도현은 그녀에게 작은 종이쪽지를 건넸다. 거기엔 이름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밀정입니다. 이 사람, 시청 교정과 소속입니다. 겉으론 한국인처럼 행동하지만, 일본의 하수인입니다. 김윤식 선생님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이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나 힘든 상황들이 나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 힘든 시기에 힘든 길을 가려하고 있었다. 윤석의 뜻을 이어 나라를 위해 일을 할 작정이었다. 마치 설강화처럼 언 땅을 뚫고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대를 거스르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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