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바람꽃

by Unikim

바람꽃은 피었다

새벽을 뚫고 전해진 소식은 들불처럼 번졌다.
함경선 동북 지점, 일제가 조밀하게 세운 탄약고와 통신소를 동시 타격하는 ‘작전명: 바람꽃’이 거사된 것이었다.
계획보다 빠른 시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엿공장에서 날아든 마지막 화물은 절반밖에 도착하지 못했으나 독립투사들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거사의 첫 불꽃은 탄약고 벽을 날려버린 폭약 한 꾸러미였다.
순이의 공장에서 밀가루 자루 속에 숨겨 보내진 폭약이 마침내 제 역할을 다한 순간이었다.
뒤이어 무장한 독립군들은 일본 순사대와 정면으로 충돌했고 치밀하게 포진된 공격 라인은 사방의 철조망을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무너졌다.
일본 헌병대는 우왕좌왕했고 기지를 완전히 빼앗기다시피 했다.


“도대체 이걸 놓치고 뭐 했단 말이냐!”
도쿄 총독부에서 파견된 특별감찰관이 서류철을 책상에 내던지며 분노를 터뜨렸다.
“서울 지부를 지금이라도 당장 갈아엎지 않고서야.....

이런 규모의 무기 이동을 감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이 보지 못한 건 장독대 아래에 숨겨진 암호 노트였고 순이의 엿 공장에서 밤새 포장되어 나간 사탕무 봉지 속 폭약과 탄창이었다.

이미 서울의 공장은 적발되어 폐쇄되었고 순이는 그 현장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일이 절반밖에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기에 이번 거사의 성공 소식은 무거운 마음을 일으켜 세운 한 줄기 바람이었다.


순이는 조용히 벽장 속 편지를 펼쳤다.

도현의 글씨였다.

“그날, 너는 우리를 살렸다. 나와 무진은 탈출했어. 난 네가 만든 길 위에서 살아났다.”

편지는 짧았지만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잠시 그녀의 눈동자에 어스름이 어렸다.

무진과 도현이 잡혀간 이후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들에겐 지하 감옥에서 끌려 나와 차디찬 물에 던져진 밤도 있었고 전기를 흐르는 철사줄 앞에 앉아야 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무진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도현은 서대문 형무소 이감 전날 밤 대나무 조각 하나로 손톱 밑을 찔러 넣는 고문에 이가 갈릴 듯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암호가 쓰인 노트를 끝내 지켜냈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 직후 북부 지부 게릴라들이 감옥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개시했고

그 혼란 속에서 무진과 도현은 기적처럼 탈출했다.

몇 발의 총성 그리고 한 줄기 불꽃이 그들의 탈출을 덮었다.

죽음 같았던 고요 속에서 피어난 건 ‘바람꽃’의 성공이었다.


외부에서는 무수한 별이 무심히 떠 있었고
그날 밤, 먼 북부 전선에서는 순이의 엿으로 싸움을 견딘 자들이 도현과 무진의 생환을 기념하며 한 잔의 막걸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 잔을 받아 든 도현은 순이의 이름을 입 안에서 천천히 불렀다.
그리고 다시, 살아 돌아온 자의 사명을 가슴에 새겼다.


그 시각, 순이는 현수의 집 작은 방에서 아픈 춘식이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춘식이의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마에 오른 열은 손바닥에 닿기도 쟌에 그 뜨거움이 느껴질 만큼 뜨거웠고 약도, 병원도 가까이 닿지 않았다. 순이는 물수건을 다시 짜 조심스레 춘식이 이마에 얹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안채 마당 끝에서 조심스레 발소리가 들리더니, 일본인 부부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염려가 어려 있었고 손에는 작은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 댁 아이...... 상태가 심각하다고 들었습니다.

저... 이거.....

해열제입니다.”

남자는 의사의 외투를 걸친, 공중보건원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 가옥의 주인이었지만 현수와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순이는 망설였으나 아들의 이마 위로 떨어진 시원한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춘식이는 일본인 부부의 아이와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

세상에는 전쟁을 만든 자와 전쟁에 살고 있을 뿐인 자들이 있었다.

순이는 그것을 뒤늦게 실감하고 있었다.


“어머니…”


순이가 가만히 속삭였다.


“저는 어쩌면 이제 이 일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춘식이를 살리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말속에는, 다시 시작할 수 있기 위한 단단한 숨 고르기가 깃들어 있었다.


현수는 마루 끝에 앉아 방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무릎을 접어 앉았다. 에 꺼낸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현수였다.


"순아… 내가 너무 겁이 났다. 네가 다칠까 봐, 애가 다칠까 봐.....

그래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거야. 춘식을 보내자는 말.....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현수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지만 단단하게 떨렸다.


"미안하다. 순이야. 다시는 그런 생각도 말도 않으련다."

"사실.... 엄마는.... 너랑 춘식이랑 같이 살고 싶어. 우리 같이 살자."


순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끝이 조금 흔들렸다.


순이는 어머니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현수의 눈동자엔 눈물이 고여 있었고 그녀의 간절함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엄마… 나도 그러고 싶어요. 정말....

하지만.....”

순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안방에서 가늘게 신음하는 춘식이의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달려간 순이는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여전히 열이 높았다.

“이 상태론 길을 나설 수 없어.”


순이는 속으로 중얼이며, 아이를 꼭 안았다.

잠시 후, 그녀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여기 머물게요."


그 말에 현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작은 방 안에 잔잔한 숨결만이 퍼져나갔다


현수는 말없이 딸의 손을 덥석 감싸 쥐었다.
그 손끝에 다시금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눈빛에서, 목소리에서, 손끝에서....
그동안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사랑이 고요히 흘러나왔다.


“너라도... 너라도 내 곁에 있어야지.
내가 숨 쉬고, 버틸 이유가.... 너밖에 없지 않니.”

현수의 이 말은 순이의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춘식의 열이 떨어지지 않던 그 밤,


순이는 마침내 결심했다.
도망치듯 떠돌기보단 잠시라도 뿌리내리고 머물기로.
그날 밤 이후, 순이는 어머니 현수의 곁에 머물렀다.
지금 떠나는 것은 도망이고,
머무는 것은 선택이라는 걸 비로소 받아들였을 때,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이는 어머니의 집에 눌러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하게, 그곳에서의 생활은 순이에게 평온을 주었다.
물론 그 평온 뒤엔 현수의 헌신과, 일본인 부부의 묵묵한 배려가 있었다.

마당을 돌며 춘식을 안아 재웠고
부엌에서 조용히 국을 끓이는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순이는 윤석이 떠난 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랄 수도 있겠구나…’

처음 몇 주 동안은 조용했다.
춘식은 열이 내리고,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순이는 아침마다 마당을 쓸고,
현수는 작은 화단의 잡초를 뽑았다.
그 틈에, 일본인 부부의 아들 ‘사토루’가 마당에 놀러 오곤 했다.
처음엔 낯을 가리던 춘식도,
며칠 지나자 뒷동산에서 진흙범벅이 되어 함께 뛰놀았다.

“어이쿠, 옷 좀 봐라.”


현수가 타박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리면,
순이도 피식 웃곤 했다.
그 웃음 속엔 오래간만에 찾은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어느덧 1년.
춘식은 부쩍 자랐다.


바깥아이들과 나무검을 들고 뛰어다니며,
자신이 “독립군 대장”이라며 으스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지고,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순이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눈에 띄지 않게 일본인 부부는 약을 구해주고 옷을 챙겨주었다.
그들 역시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흑백으로만 나눌 수 없다는 걸,
순이는 그제야 조금씩 깨달아갔다.

어느 날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마당에 작은 비단잉어가 담긴 수조가 생겼다.
사토루의 아버지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는 조용히 말하고 물러났다.
춘식과 사토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앞에 앉아
물고기가 입을 뻐끔거리는 걸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밤이면 순이는 방 안에서 천천히 바느질을 했다.
작아진 옷을 고치고, 해진 이불을 꿰맸다.
그 옆에선 현수가 낮에 주워온 솔방울로 화롯불을 살피곤 했다.
두 여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온기가,
그 작고 낡은 방을 가득 채웠다.

봄에는 진달래꽃 따다가 전을 부쳤고,
여름에는 찬물에 수박을 띄워 놓고 마당에서 식구들이 모여 먹었다.
가을엔 춘식이 도토리를 주워 모아 현수에게 바치듯 내밀었고,
겨울이 오기 전, 순이는 춘식에게 손수 누비옷을 지어 입혔다.


“이건 엄마가 춘식이 위해서 오랜만에 만든 옷이야.”


아이의 뺨에 입맞춤하며 속삭일 때,
순이는 자신이 어떤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였다.
소란스럽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았지만
그 일상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에게 주어진 짧고 따뜻한 ‘휴전’ 같은 시간이었다.

.

keyword
이전 16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