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생존이기주의

by Unikim

그해 가을, 춘식이와 순이가 현수의 집에 들어온 지 꼭 1년이 되었다.
아이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고, 눈빛은 어느새 또래 아이들처럼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현수의 손길과 일본인 주인 부부의 보살핌 속에, 순이도 차츰 지난 상처를 봉합하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 주인 부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발령이 끝났습니다. 부모님이 아프셔서요…"
이유는 단정하고 담백했지만, 집 안 공기는 금세 무거워졌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들어 올 새 주인이 헌병대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일 거야."


하지만 그건 소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새로이 일본인 가족이 이 집 주인댁에 들어왔다.

그냥 보기에는 어느 집의 평범한 가정집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만 현수는 그의 이사를 돕고 있는 헌병대들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은 몹시도 떨렸고 혈액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조심스레 주인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어 경악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들어온 새로운 주인은 다름 아닌 헌병대 소속간부였다. 그는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헌병대 출신, 예전에 순이를 추적하던 조직의 한 인물이었다. 순이가 한 때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던 그 조직과 맞닿아 있는 일본인이었다.

현수는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날 밤, 등잔불 아래서 순이와 춘식이의 짐을 꾸렸다.


'이 집은 이제 안전하지 않아. 지난번에 보내려던 시댁 친척 댁으로 가야 해.'


춘식이와 놀이를 하고 들어 오던 순이가 현수의 분주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 무슨 일이셔요?"

"앉지 마라. 어서 가자."

"예? 갑자기 왜요?"

"쉿...."

작은 목소리로 순이가 되묻는다.

"무슨 일이셔요?"

"이 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헌병대 사람이데이....

눈에 띄기 전에 어서 가야 한다."

"예?"

"뭘 그리 우두커니 썼나? 나가자. 어여...."


순이와 춘식은 그 길로 현수의 손에 이끌려 인력거에 올랐다.

급히 부른 인력거에 몸을 실은 순이와 춘식은, 한밤중 골목을 조심스레 빠져나갔다.

시댁 친척집은 산골 마을 깊숙이 있었다.
마당 한켠에 물레가 놓여 있었고 부엌 앞에는 삶은 베를 헹구는 큰 통이 있었다.
순이는 새벽마다 물레질을 하고 저녁이면 바느질로 옷을 지었다.
봄이면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가을이면 고구마 줄기를 벗기며 친척집 일을 거들었다.
말없이, 그러나 부지런히 하루를 채워나갔다.

춘식은 그 집 아이들과 곧 친해졌다.
여섯 살 많은 6촌 형은 장난꾸러기였고 또래 동생은 나무 위에서 까마귀 둥지를 보러 가자고 졸라댔다.
흙탕물 속에서 맨발로 고기를 잡다 옷을 흠뻑 젖히기도 했고, 겨울엔 마당 한켠에 작은 눈집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하지만 1944년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일제의 압박은 점점 심해졌다.
마을마다 공출과 부역이 늘어났고 이번에는 ‘다리 공사’라는 명목의 동원령이 떨어졌다.
각 집에서 반드시 한 사람씩 내야 한다는 지시였다.

춘식이의 친가에는 6촌 형제들과 오촌 아재, 그리고 할아버지가 있었다.
노쇠한 할아버지는 친손주를 공사장에 내보내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꾀를 하나 냈다.
어느 날 그는 순이에게 읍내에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시키며 말했다.


"춘식이도 같이 데리고 가거라. 거긴 좀 놀 데도 있을 게다."

순이는 아무 의심 없이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장에 다녀오는 길, 마을 어귀에 있는 다리 공사 현장 근처에서 춘식에게 말했다.

"엄마 잠깐 일 보고 올 테니, 여기서 형들이랑 놀아."


그리고는 짐을 든 채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그러나 춘식은 곧 할아버지의 심부름꾼에게 불려 나갔다.


"이 집에 발 붙이고 살려면 니도 힘 좀 보태야지."


마음 약한 아홉 살 아이는 윽박과 회유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명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 속에서 그는 무거운 돌을 날랐다.

그 일이 하루, 이틀… 열흘을 넘겼다.
손바닥은 터지고, 어깨는 시큰거렸지만, 춘식은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건 비밀이다. 네 엄마 알면 걱정만 늘어난다."


그 말은 약속이자, 은근한 협박이었다.

며칠 뒤, 순이는 장에서 돌아오다 공사장 한켠에서 돌을 나르는 아이를 보았다.
깡마른 팔, 땀에 젖은 뒷머리, 구부정한 어깨.... 그리고 아직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 모습...
그건, 분명 춘식이었다.

순이의 숨이 멎는 듯했다.
뛰어들어 아이를 끌어안자 춘식은 미안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순이의 억장이 무너졌다.
이 아이가 지켜낸 것은 겨우 이 집 한 칸 그리고 엄마를 향한 어린 마음뿐이었다.

그날 밤, 순이는 부엌에 앉아 물레를 돌렸다.
쌔근쌔근 잠든 춘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 올, 한 올 감아올리는 실에,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묵묵한 결심이 함께 감겼다.
전쟁은 이토록 작은 손까지도 놓아주지 않는구나....
그 생각이 순이의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타올랐다.

keyword
이전 17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