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발자국
그. 날 밤이었다.
물레 소리가 멎고 순이는 조용히 손을 내려놓았다.
흙마당 끝,
초승달 아래 서 있는 춘식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작은 어깨는 여전히 지난번 다리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던 날의 그림자를 안고 있었다.
그 기억이 순이의 가슴속을 매섭게 할퀴었다.
다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게 하리라.
그날 밤, 순이는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제가 나가서 벌겠습니다. 대신 춘식이는 서당에 보내주세요.”
순이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오래 담배를 피우며 말이 없었다.
연기 속에서 오래 굳어 있던 표정이 풀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해 보거라.”
그다음 날부터 새벽마다 순이는 고무신을 끌고 읍내 방직공장으로 향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된 일은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났다.
손바닥은 실밥과 먼지에 까맣게 물들었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올 때면 몸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럼에도 순이의 얼굴에는 미묘한 안도감이 번졌다.
춘식이가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또래 아이들과 뛰놀며 웃고 있었으니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자 모자에게도 작은 평화가 찾아왔다.
서당 마당에서 서툰 붓글씨를 쓰며 “母, 子”를 따라 적는 춘식을 보며 순이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 웃음 하나면 하루의 고단함쯤은 잊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일터로 간 순이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늦는 날도 있겠지” 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순이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사이 마을에는 헌병대가 여자들을 연행해 갔다는 소문이 흘렀다.
누군가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단속에 걸렸다고 했다.
확실한 건 순이가 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며칠 후, 무거운 침묵이 감돌던 안채에서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 집 먹여 살리려면 누군가는 가야지."
그 말의 끝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리고 그 시선은 고스란히 춘식에게 닿았다.
"춘식아~ 니는 내일부터 다시 다리에 공사장 일 나가그라. 니도 밥값은 해야 되지 안겄나?”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끝을 꼭 쥔 채 낮게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춘식은 다리 공사 현장에 섰다.
손보다 훨씬 큰 돌을 어깨에 짊어지고,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며 한 발 한 발 옮겼다.
멀리서 서당 친구들이 장난을 치며 손을 흔들었지만 춘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웃음과 놀림이, 지금의 자신과는 너무 먼 세상 같았기 때문이었다.
해가 기울고 공사장의 먼지가 붉게 물들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흙냄새와 함께 순이의 목소리가 스쳤다.
“춘식아, 조금만 더 버티자…”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곧 흩어졌다.
순이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아이의 발자국만이 다시 무겁게 길 위에 찍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