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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눈물로 넘는 고개

by Unikim

때는 산딸기가 나던 계절이었다.

1945년 6월 초의 어느 날 육촌 아우의 할아버지가 춘식이를 불렀다.


"이제 그만 이 집서 나가삐라. 니그 어매도 없고 우리도 살림이 빠듯하다 아이가. 더는 니를 여기 살게 해 줄 수가 없데이."

"아 어매가 올 때까지는 델구 있어야 안 되겠습니꺼."

"뭔 소리고? 그게 언젠데? 더는 안 된다."

"아가 뭔 죕니꺼?"

"자~ 입은 옷 싹다 벗겨가 내 쫓아뿌라. 그동안 먹고 잔 값은 해야 안 되겄나."


이제 겨우 열살 먹은 춘식이는 그렇게 친척집에서 쫓겨났다.

속옷 바람에 내쫓기는 춘식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육촌 아우의 할머니가 다 해진 옷을 하나 들고 삼베에 밥을 싸서 춘식을 따라 나왔다.


"야야~ 이거 받그라. 이 옷이라도 입어야 안 되겠나. 내 미안타."


춘식이는 할머니가 버리려 밖에 놓아두었던 옷무더기 속에서 꺼낸 옷 한 벌을 받아 입고 삼베에 쌓인 밥을 들고 길을 나섰다.


"할무이~ 우리 어머니 어데 가야 만날 수 있습니꺼?"

"내도 모른다. 이 난리 속에 무신 일이 있는 건지 내도 알 수가 없데이"

"니그 외할머니집 기억하나?"


춘식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안 들어오나"

"알았심더. 갑니더."

"니그 외할머니 찾아가그라."


어린 춘식이는 오래전 떠나온 외가를 찾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춘식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외할매 집이 어덴 줄도 모르고 울 어매도 없는디 거길 우에 갑니꺼."


그렇게 춘식이는 집에서 내 쫓기어 목적지도 없는 어린 나그네가 되었다.

처음엔 울먹이며 그냥 걸었다. 가는 길에 엄마가 만나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터벅터벅 그렇게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어둑한 주변을 둘러 보며 춘식은 망설였다.

하지만 다른 갈 길이 보이질 않았다. 언젠가 엄마와 걸어 넘던 산길을 떠올리며 춘식은 산고개를 넘으려 산길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습습하고 끈적였으며 스산했다.

산을 넘고 있는 춘식이는 너무 무서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엄마를 불렀다. 아버지도 삼촌도 할머니도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걷고 또 걸어도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는 산중..... 칡흑같은 어둠 속에 오직 춘식이 홀로 던져져 있었다.



사방에서는 짐승의 소리가 들리고 구슬픈 새소리가 들렸다. 곡소리나 귀신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다급한 춘식은 엄마를 불러 보지만 대답이 없고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 봐도 두려운 메아리 소리뿐 그 어느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날 밤 세상은 그렇게 차갑게 춘식을 그곳에 버려두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눈물과 설움과 두려움으로 걷고 또 걸은 춘식은 드디어 불빛 하나를 만났다.

그리 산을 넘으니 어느새 날도 밝아 왔다. 춘식은 그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더 조금 더.... 불빛을 향해 걸으니 마을이 하나 보였다.

그곳엔 이른 아침부터 농사일을 하러 일터에 나가는 어른들이 보였고 동네어귀엔 아침 일찍 잠이 깬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밤에는 무서웠지만 10살 어린 춘식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관심을 보였다. 형들과 지내온 춘식이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게 춘식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종일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놀던 춘식이는 점점 쓸쓸해져 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아이들의 부모님이 함께 놀던 친구들을 하나둘씩 데리고 집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친구마저 저녁을 먹으라며 친구의 어머니가 데리고 가 버렸다.

또다시 춘식이는 홀로 남겨졌다. 아무도 낯선 나그네 친구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이 집 저 집에 불이 들어오고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주변은 깜깜해졌다.

굴둑 너머로부터 맛있는 음식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그 냄새는 잔인하게도 너무나 맛난 냄새였다. 그제서야 배가 고파지는 춘식......

춘식은 할머니가 건네어 주신 삼베뭉치가 떠올랐다. 삼베뭉치를 꺼내어 열어 보니 그곳엔 밥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춘식에겐 밥을 먹으려 해도 들어가 먹을 집이 없었다. 돌아갈 집이 없다는 사실이 춘식을 더욱 위축되게 하였다.

춘식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멀리 언젠가 이 마을을 지나며 엄마랑 같이 자던 쪽마루가 보였다. 춘식은 쪽마루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걸터앉았다.

이 쪽마루는 오늘날 공원 벤치 같은 것인데 꽤 넓고 튼튼했다.

쪽마루에 걸터앉은 춘식은 그리움과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울며 춘식은 그 쪽마루에 앉아 삼베 속 밥을 먹었다.

슬픔이 마음속 깊이 밀려들었지만 애써 슬픔을 외면한 채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밥을 다 먹은 춘식이는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 쪽마루에 누워 금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예~예~"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춘식을 깨웠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자니? 입 돌아 갈라 어서 일어나 집에 가렴."


잠에서 막 깨어나 정신이 없던 춘식이는 어떤 대답도 못했다.

그리고 춘식이 일어나 앉는 사이 잠을 깨우던 아주머니는 가 버렸다.

춘식이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또다시 길을 나섰다.

터벅터벅 걷는 사이 해님이 고개를 내밀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수록 해는 뜨거워졌고 춘식은 몹시 덥고 목말랐다.

춘식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엄마와 외할머니를 아는지 물었다.


"저희 엄마를 아시나요? 이름은 순이이고 방직공장에 다녀요. 방직공장에 가는 길 좀 알려 주세요."

"미안하다. 잘 모르겠는데~~"


한참을 걷고 묻고 찾다 보니 어느새 또 해가 졌다. 때마침 춘식은 또 다른 한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허름한 집 툇마루에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얘... 누굴 찾니?"

"예. 저희 어무이를 찾습니더."

"어무이가 왜? 어무이가 어디 가셨는데? 집에서 기다리지...."

"저.... 어무이가 일을 나가셨는데 우엔 일인지 못 돌아 오셨습니더."

"그랬나... 그래도 집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집은 어디가?"


춘식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아지매 밥 좀 주이소."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었드노? 이 시간까지... 얼마나 배가 고플끼가...

잠시 예 있그레이."


잠시 후 아주머니가 밥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


"여 있다. 밥 묵으라. 묵고 집에 가그라."

"고맙심더."

"와~ 근데 어데 가는 길이었드노?"

"어덴지 모릅니더. 그저 어무이 찾이러 갑니더."

"그랬드나...

그래도 어딘지는 알고 가는기가?"

"방직공장에 찾으러 갈낀데 거길 아는 사람이 없습니더."

"방직공장이라 하믄 저기 읍내랑 거 어느 역에 있다 카던데..."

"역 말입니꺼? 거긴 우에 가면 됩니꺼?"

가는 거야 이 길 따라 쭉 거기로 가면 되지만서도 공연히 길 엇갈리면 안되니까 집 가서 기다리거라."

"갈 집이 없습니더."

"어린 거이 뭔 사연이 있는기가....니 몇 살이고?"

"열 살입니더."

"방직공장 말고 방직공장 이름이 뭐꼬? 어무이 있는 곳을 찾으려면 방직공장 아름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어무이한테 들은 거 없드나? 사람이 길을 나살 때는 니그 집이나 어무이 공장이나 갈 목적지를 정해 놓고 가야 하는기라..."


춘식은 망설이고 있다가 대답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저.... 아지매~

여서 지가 하룻밤만 자고 갈 수 있겠습니꺼?"

"미안타. 울 집에는 그럴만한 방이 없다 아이가."


춘식은 슬픈 눈으로 아주머니를 보았다.


"정 그라믄 저기 헛간가 자그라~? 바깥보다는 낫지 않겠나..."

"에. 고맙습니더."


춘식은 인사를 하고 터덜터덜 헛간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허름한 창고였다. 짚들이 깔려 있었고 농기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춘식은 헛간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춘식은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무던한 성격의 아이였다.

"앗. 따거."

"위~잉"

"앗 따거. 모기들아 그만 와."


때는 여름인지라 헛간에는 엄청나게 많은 모기들이 있었다.

쫒아도 쫒아도 모기들은 춘식에게 날아왔다.

수많은 모기들도 춘식과 함께 그날 밤 그곳에 머물렀다.

밤새 춘식은 그 모기떼들에게 피를 빼앗겼다. 그렇게 헌혈을 한 춘식은 아침 일찍 또 길을 나섰다.

그렇게 춘식은 그날도 엄마를 찾아 길을 헤매었다.


때는 1945년 여름, 산에는 산딸기가 붉게 익어가던 시절이었다.
춘식은 야트막한 산을 넘었다. 인근에 마을도 있었고 달빛이 밝아서 지난번처럼 산길이 어둡지 않았다.

얕은 산을 넘는 춘식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이는 나무와 풀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는 배를 움켜쥐며 산길을 내려왔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길가에 박힌 작은 붉은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산딸기였다.

춘식이는 벌레가 앉아 있는지도 살피지 않고 한 움큼을 따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엄마도 이거 좋아했는데…’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밤은 깊어졌다. 매미 울음이 퍼붓는 여름밤, 춘식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주린배를 산딸기로 채운 춘식은 길을 따라 밤새 쭉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김천역에 다다랐다.
김천역에 닿았을 때 이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역 구석에는 그와 같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해진 옷, 앙상한 팔다리, 그리고 똑같은 눈빛.


‘나 같은 애들이 이렇게 많구나… 다들 엄마를 잃은 거겠지.’

춘식은 기둥에 몸을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산딸기의 단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 맛은 이상하게도 그를 버티게 했다.


‘엄마, 나 꼭 찾을 거야.’

그리고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뜨거운 아침 햇살이 역 위로 번지며, 매미 소리는 끝내 멎지 않았다.


"많다.....

나 같은 애들이 많구나!!

저 아이들도 엄마를 잃어버렸나 봐."


춘식이가 눈을 떴을 때 김천역은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역 구석에는 해진 옷을 걸친 아이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누구 하나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만은 다 똑같았다.
배고픔에 지쳐 있고, 어딘가로 가야 하지만 갈 데가 없는 눈빛.

춘식은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또 중얼거렸다.


“많다… 나 같은 애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겪은 일이 자신만의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 중 몇은 돌멩이로 놀이를 하고 있었고 몇은 아무 표정도 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막내 동생을 품에 안은 채 여전히 엄마를 기다리는 듯했다.


어려운 그 시절에는 부모를 잃은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많은 그 아이들이 서로 의지하며 여기 김천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춘식은 그 틈에 조용히 앉았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어젯밤 산길에서 따먹은 산딸기의 단맛이 아직 입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기차가 우렁찬 기적 소리를 울리며 역으로 들어왔다.
춘식은 고개를 들어 그 연기를 바라보았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하얀 증기는 한없이 멀리, 멀리 뻗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연기를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엄마… 나, 여기 있어.”

그리고는 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아침 햇살이 역 위로 번져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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