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여름, 김천역
김천역은 여름 더위와 함께 술렁거렸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피곤과 초조가 묻어 있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일본 패전 소문은 이미 아이들 입에도 오르내렸다.
"전쟁이 곧 끝난다더라."
"그렇다고 우리한테 좋은 일이 있을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우릴 더 괴롭히면 어떡하지?"
이 작은 아이들조차도 국제 정세를 운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상황이 그들에게 희망인지 두려움인지조차 알 수 없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본이 전쟁에 패하는 건 좋은 거 아니야?"
"맞아. 그럼 더 이상 우릴 잡아가지 않지 않겠지?"
"웅웅. 맞아 맞아."
"이제 그만 전쟁도 멈추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사라지면 좋겠어."
"그렇지.... 일본사람들은 일본으로 다 가 버리면 좋겠다니께."
한참 아이들의 대화가 오고 가던 시간 춘식은 역 구석에서 혼자 주저앉아 땀에 젖은 얼굴을 닦고 있었다. 춘식 홀로 여러 개의 산을 넘어 마을을 지나 이곳까지 오는 길은 너무나 길고 외로웠다. 그는 며칠 전 밤, 울면서 깜깜한 산길을 넘던 순간이 떠오르곤 했다. 너무나 무섭고 슬픈 기억이기에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아픔의 밤들은 발밑에는 산딸기가 붉게 익어 있었지만 배고픔을 달래기엔 그마저도 모자랐던 그런 고통의 밤들이었다. 춘식은 지난날들을 떠 올리며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김천역에 왔는데......
엄마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은 나 혼자인데.....
어디서 엄마를 찾지?
방직 공장.... 방직 공장을 찾아야 해’
여러 생각들이 춘식의 머리를 스칠 때 누군가 그의 앞에 물병을 내밀었다.
“야, 목마르제?”
춘식이 고개를 들자 또래의 소년이 서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고 눈빛은 의외로 따뜻했다. 엊그제 춘식의 친구가 된 병수였다.
병수는 우울해 보이는 춘식에게 장난을 건넸다.
“나는 병수라 카이. 니는?”
“춘식”
춘식은 시크하게 대답했다.
병수는 씩 웃더니 춘식을 툭 치며 말했다.
“내 따라와라. 여기는 니 같은 애들이 많다 아이가.”
"나도 안다. 봤다 아이가.
나 같은 아들이 수두룩 한 거이 내도 여서 봐서 안다. "
춘식은 툴툴대며 병수를 따라나섰다.
역 안쪽 낡은 대합실 한쪽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시끌벅적 대화에 몰입되어 있었다. 그들 중 한 소녀가 병수와 춘식에게 다가왔다. 옥희였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춘식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춘식아~~”
"응?"
“겁내지 마라. 세상이 어찌 돌아 가든 간에 우리끼리 똘똘 뭉치면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다?"
"그래. 뭐든 다 할 수 있다."
"응"
"와? 니는 뭐가 하고 싶은데?"
"나는.... 나는...."
"그래 너는 뭐?"
"나는 엄마를 찾을 끼다."
"엄마? 서울서 김서방 찾나?"
"여서 어찌 엄마를 찾을 낀데?"
"모른다. 하지만서도 내는 찾을끼다."
춘식은 옥희를 빤히 보았다. 춘식의 눈은 간절함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니그 어무이 찾자. 우리가 도울끼다."
춘식은 그 순간 생각했다. 비록 부모를 잃고 길을 잃었지만 여기서 새로운 인연과 생활과 꿈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결심했다. 반드시 어머니를 찾겠노라고....
그날 밤, 아이들은 대합실 마룻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잤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세상이었다. 자유로웠다. 비록 집도 부모도 없는 아이들의 세상이었지만 그곳엔 그 아이들에겐 자유가 있었다. 역을 관리하는 이들도 이 아이들의 역에서의 생활을 눈 감아 주었다. 내 쫒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은 소일거리라도 가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때 그 시절.... 김천역에는 그런 인심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래서 김천역의 아이들은 거기서 얻어먹고 또 잠을 자며 그 시절의 매일을 살아 나갔다.
다음 날 아이들은 굴뚝을 타고 퍼지는 냄새를 따라갔다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집 앞을 기웃거렸다. 그때 따뜻한 미소를 가진 아주머니가 아이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더니 따뜻한 밥을 담아 아이들에게 먹게 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을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일본 비행기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놀란 아이들은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산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야! 땅 파라!"
"저기~ 저 방공호다! 방공호로 들어가라”
병수가 외치자 아이들은 겁에 질려 흙바닥을 긁으며 몸을 웅크렸다.
비록 포탄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아이들은 숨죽여 떨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낮게 날던 비행기는 지나갔고 다시 동내는 조용해졌다.
비행기가 떠나자 상황을 확인한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됐다, 갔다 아이가.”
그러고는 아이들은 아까 그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다시 나타나자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반가이 부르며 말했다.
“야들아~ 이리 온나!! 아까 먹던 거이 마저 먹으라.”
"네. 감사합니더."
아이들은 껄껄 웃으며 그 찬밥을 깨끗이 비웠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춘식은 알고 있었다.
이 평화 같은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늘 쫓기듯 매일을 살아온 춘식은 습관적으로 어려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여름의 김천역도 그렇게 불안한 매일에 던져지고 있었다.
춘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병수와 옥희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은 곧 뒤집힐 것 같았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 이 작은 아이들의 운명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1945년 김천역의 아이들 사이에 뭔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퍼지는 이상한 기운을 춘식도 느낄 수 있었다.
역을 오가는 일본인 관리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군용 열차가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전쟁..... 끝나는 기라.”
"잘 되었네. 그럼 일본은 이제 망하는 기가"
"망한 거 아이가?"
"얼른 가뿔면 좋겠다 아이가...."
“그라믄 이자 우리한테도 평화가 오나?”
"와야지... 우리도 평화와 자유를 가져야지...."
"맞다. 자유~ 우리나라도 이자 자유국이 될꺼이다."
사람들의 소리를 귀를 쫑긋하고 듣던 아이들은 미소를 띄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