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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천역에서....

by Unikim

김천역 플랫폼은 한낮의 뜨거운 기운을 그대로 품은 채 숨죽인 듯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곧 땀 냄새와 석탄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기차의 차창을 두드리는 군홧발 소리와 행상의 고함소리에 깨졌다.


춘식은 역 구석, 가마니 더미 뒤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산을 넘느라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는 이미 말라 굳었고, 발바닥은 돌멩이에 긁혀 피가 마른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배는 고프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럼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낯선 이곳에서 눈을 감는다는 건 모든 걸 잃는다는 뜻 같았다.


“야, 너 어디서 왔냐?”

거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춘식이 몸이 움찔했다. 돌아보니, 자기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더러운 군용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서 있었다. 옆에는 얼굴이 까만 여자아이와, 바지 한쪽이 찢어진 앳된 소년이 서 있었다.


“저… 그냥…”

“그냥은 없어. 여기서 그냥 있으면 군바리한테 쫓겨나. 밥은 먹었냐?”

춘식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여자아이가 자기 치마 주머니에서 빨간 열매 몇 개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산딸기야. 오늘 산에서 따온 거야. 먹어. 배고프지?”


춘식은 조심스레 열매를 집어 입에 넣었다. 새콤한 맛이 혀끝을 스쳤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몹시 그리웠다. 그 그리움 때문인 건지 춘식은 이 작은 산딸기 앞에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날 밤, 춘식은 그 아이들과 함께 역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다. 병수, 옥희, 말수. 그들이 김천역 아이들이었다. 병수는 짐꾼 일을 하며 벌어온 고구마를 옥희와 나누어 먹었고, 말수는 버려진 철길 옆에서 고철을 주워 팔았다. 춘식도 곧 그 무리에 끼었다. 기차가 들어오면 행상들의 짐을 날라주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것이 그들의 하루였다.


“야, 빨리 와! 헌병대 떴다!”

그날도 갑자기 역이 술렁였다. 일본군 헌병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아이들은 잽싸게 기차 밑으로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인 채, 철 바퀴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어둠 속에서 춘식은 두 손을 꼭 쥐었다.

‘잡히면 끝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위험은 늘 곁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 와중에도 웃었다. 옥희는 “내일은 기차 타고 평양 간다!”며 허풍을 떨었고, 병수는 “기차가 우리 집이야!”라며 자랑했다. 춘식은 그들 사이에서 점점 말이 많아졌다. 오랜만에 웃음이 났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언제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현수의 따뜻한 품과, 순이의 고운 손길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며칠 뒤, 병수는 기차에 실린 쌀자루를 훔치려다 헌병대에게 쫓기는 일을 당했다. 아이들은 힘껏 달렸다. 병수는 발목을 삐끗했고, 헌병대의 호통이 등 뒤에서 쏟아졌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춘식이 병수를 잡아끌었다.

“이리로 와!”

그는 병수의 팔을 낚아채 철길 옆 배수로로 뛰어들었다.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병수는 무사했다.


그날 밤, 병수가 말했다.

“너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대단하네.”

춘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철길 너머로 보이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노을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리고 춘식의 마음은 그보다 더 뜨겁게 단단해지고 있었다.

김천역의 밤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춘식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니었다. 그곳엔 불타는 듯한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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