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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숨은 물결

by Unikim

밤이 깊어도 공장 굴뚝은 여전히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엿이 끓는 달콤한 냄새가 골목마다 스며들었지만, 그 속엔 긴장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순이는 작업장 한쪽에서 쌀엿을 식히며, 손에 쥔 작은 쪽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진이 떠나기 전, 몰래 남긴 쪽지였다.


“서울 지부 거점은 무사히 이전됐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일본 헌병대가 북쪽 산길을 수색 중이니, 당분간 조심하라. 움직임이 눈에 띄면 일본군이 곧장 이곳을 수색할 것이다. 순이, 네가 이 공장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우리 남쪽 조직의 숨통을 쥐고 있다.”


순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다.

이 공장은 더 이상 단순한 위장 공장이 아니었다. 이제 이곳은 단순히 자금을 모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하 거점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의심하는 순간, 자신과 공장 사람들 모두가 위험에 처할 터였다.


며칠 후, 무진과 도현이 보낸 전갈이 도착했다. 백 선생의 글씨였다.


“순이, 네가 맡은 이 공장은 단순한 거점이 아니다. 남쪽 독립조직의 연결 고리다. 혹시라도 발각되면, 서쪽 선교사 루트로 곧장 빠져야 한다. 네 결정이 곧 우리 모두를 살릴 것이다.”



며칠 뒤, 공장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영식이었다.

그의 얼굴엔 예전보다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순이, 아직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가? 위험한 줄 모르나?”


순이는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영식 씨, 당신이 이 공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엿을 만들지 않아요. 모두가 자기 몫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영식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헌병대가 곧 이곳을 수색할 거다. 나도 더는 널 막아줄 수 없어.”


그 말만 남기고 영식은 떠났다. 순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아. 이 공장은,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밤이 되자 순이는 공장 지하로 내려갔다. 좁은 방 안에는 무진과 도현, 그리고 몇몇 동지들이 모여 있었다.


“서울에서 무기 반입 소식이 곧 도착할 겁니다.” 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자금만 대지 않습니다. 필요한 물자를 이 공장에서 위장해 실어 나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주목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영식 씨가 다녀 갔어요. 곧 이곳에 수색이 진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거사에 물품을 대는 일이....

이곳만큼 적절한 곳이 없습니다. 위치나 규모 모두 다 이곳이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럼 어쩌지요?"

"허일실시" 나 "금일탈각"

"시간이나 날짜에 교란을 일으키자는 말인가?"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계책이 아닐까?"

"만일 일에 차질이 생긴다 해도 다른 지부에 시간을 벌어줄 수 있으니 우리가 맡아 진행해야 합니다."


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공장은 단순히 자금을 대는 거점이 아니라 직접 행동을 준비하는 거점이 되었다.

엿의 달콤한 향이 공장 위로 퍼지고 있었지만 지하에서는 조용한 폭풍이 자라고 있었다.


새벽녘, 순이는 공장 마당에 서서 동이 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엿이 식으며 퍼지는 달콤한 향이 바람에 실려 나갔다.

그러나 그 향 속에는 이제 조용하지만 거대한 물결이 숨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윤석, 당신이 지키려 했던 세상… 내가 이어갈게요.

이제 시작이야. 이 작은 공장에서 퍼져나가는 이 물결이 언젠가는 큰 파도가 되어야 해.’


그녀의 눈빛은 다시 단단해졌다. 순이의 눈빛이 굳어졌다. 공장은 그렇게 또 하나의 전선이 되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조용한 아침 공기 속에서도 공장은 마치 숨은 물결처럼 큰일을 준비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며칠 후 무기가 공장 지하로 반입되었다.

이 달 말에 치러질 거사를 위해 준비된 무기들과 물자들이었다. 물론 잘 위장되어 들어왔고 무사히 공장 지하에 안착되었다.


하지만 공장은 결국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 정보가 새어 나갔고

거사가 치러지기로 한 날의 새벽,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무기와 물자가 절반 정도 공급되고 있던 중이었다.


공장 위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났다.


“쉿!”


누군가 속삭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일본 헌병대가 몰려들어왔다.

무진이 즉시 순이에게 외쳤다.


“순이, 춘식을 데리고 나가! 우리는 북쪽 길로 빠질 테니 넌 절대 붙잡히면 안 된다!”


무진과 도현은 순이의 길을 열어 주고 순이가 빠져나갈 수 있게 그들을 가려 주었다.


공장 지하에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지하에 있는 공장 문서들이 바닥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지하의 문서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무진과 도현은 끝까지 저항하다 붙잡혔고, 백 선생은 끝내 소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순이는 지하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고함을 들으며 춘식의 손을 꼭 붙잡았다.

“춘식아, 절대 울면 안 된단다. 앞만 보고 뛰어야 해. 할 수 있지?.”


그녀는 무진과 도현의 도움으로 미리 준비해 둔 뒷문으로 춘식이를 데리고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달빛 없는 골목길을 내달렸다.

엿의 달콤한 향이 남아 있던 공장은 그렇게 불길에 휩싸여 사라져 갔다.

며칠을 걸쳐 도망친 끝에 순이는 마침내 어머니 현수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예전과 달랐다.
현수는 초라한 몸차림으로 순이를 맞았다.

“재산은 이미 다 몰수당했다. 일본 놈들이 여기까지 손을 뻗쳤다.”


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수는 잠시 순이와 춘식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일본인 간부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신세야.

하지만…


말을 하려다 현수가 머뭇거렸다.


"순이야, 이제 조용히 살아야 한다. 너라도, 춘식이라도 무사해야지..”


순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혁명도, 공장도 모두 잃었지만, 이제는 아이만큼은 지켜야 했다.

현수의 집에서 보낸 며칠 동안, 순이는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조용히 지냈다.

현수의 집에서의 나날은 잔잔했다.
그러나 순이의 마음은 한시도 편치 않았다.
밤마다 불길 속 무진과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춘식은 그런 엄마를 모르고, 작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엄마, 우리 여기서 오래 살 수 있어?”

순이는 웃으려 했지만, 눈가가 젖었다.


“그래, 춘식아.... 오래 살자.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을까….’

며칠 뒤, 현수는 결심한 듯 말했다.


“춘식이는 본가로 돌려보내야겠다. 그곳이 더 안전하다.”


순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이 혼자 보낼 수 없어요. 춘식이는… 제 손으로 지켜야 해요.”

"이 난국에 쫓기는 신세로 아이를 안전하게 지킨다는 건 무리다. 보내자. 춘식이...."

"아니요. 춘식이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아~ 그럼 어쩌려고...."


현수는 순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순이는 결국 시댁 쪽 친척집으로 춘식이와 함께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다.


"어머니~ 춘식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아이와 함께 떠나겠어요."

"꼭 그리해야겠니? 나는... 이 어미는 안 보이더냐?"

"죄송해요. 어머니... 전 춘식이의 엄마인걸요..."

"그래... 너 말 잘했다. 넌 엄마다. 엄마인기라....

다 잊고 엄마로만 살아라. 독립운동도 글 쓰는 것도 다 내려 두고 춘식이 엄마로만 살그라... 그래야 너도 아도 산다. 알겠나?"

"하지만 전 조국의 현실도 윤석 씨의 뜻도 외면할 수 없는걸요...."


현수는 한숨을 쉬며 불안한 눈으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너도 춘식이도 살릴 수 있을까?'


떠나기 전날 밤, 현수는 조용히 순이의 손을 잡았다.

“순이야, 네가 다시 싸우려면 살아남아야 한다. 잊지 마라.

훗날을 위해 지금은 어디 가든 조용히 평범하게 살자. 알았나?

그저 춘식이 엄마로만 살아라."


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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