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엿향기 나는 길 위에서

by Unikim

등 뒤에서 딸깍~

낮고 짧은 금속성 소리가 울렸다.
영식은 몸을 굳혔다. 이 익숙한 소리.


“오랜만이야, 영식아.”

등 뒤에서 딸깍—
낮고 짧은 금속성 소리가 울렸다.
영식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돌렸다. 익숙한, 그러나 원하지 않았던 소리였다.

“오랜만이야, 영식아.”

무진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공기보다 차갑고, 칼날처럼 곧았다.




그날 무진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순이의 불안한 눈빛을 뒤로한 채 혼자 길을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러나 분명히 있어야 할 장소였다.
춘식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닿았던 지점.

순이와 춘식이 머물렀던 암자....

그곳엔 여전히 파가 머물고 있었다.

춘식의 행방을 캐묻는 무진에게 그녀는 말했다.


"기어이 불을 피웠구먼...."

"예?"

"아닐쎄.... 그렇게 사라져서 갈 곳을 찾아 잘 갔나 보다 했더니....

기어이 불을 피우고 말았구먼.""


노파는 한숨을 쉬더니 서당에서 부모 잃은 아이들을 종종 거둔다는 말을 전했다. 무진은 암자를 천천히 살펴본 후 서당을 향해 내려갔다.

서당.
종지기의 아이들이 다니던 그곳이었다.
낡은 마룻바닥, 먹내음 밴 종이들,

왠지 정겨운 장면이었다.

무진은 천천히 서당을 둘러보았다.

서당의 구조와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무진이었다. 서당 안쪽은 살펴본 무진은 뒤뜰로 나갔다. 그곳에는 연못이 있고 아름들이 나무들이 있고 강아지도 한 마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서당 뒤뜰을 살피던 무진은 그곳에서 반가운 아이를 만났다. 낯익은 모습에 목소리...

그리고 정겨운 눈빛.


그곳에서 만난 작은 아이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진을 올려다봤다.

“이름이 뭐니?”

“춘식이요.”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 아이가 웃으며 대을 듣는 순간,
무진은 안도와 동시에 한 줄기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안도와 분노, 고마움과 미안함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춘식은 살아 있었다.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이 맑은 모습으로 또래 아이들과 함께 이곳 서당에 머물고 있었다.

청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춘식이 무진은 마냥 사랑스럽다.




지금, 무진은 영식 앞에 서 있었다.
춘식을 찾았고 영식이 더는 순이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왜 날 찾아왔지?!”

“그만둬. 순이는 네가 쥘 패가 아니야.”

영식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패라고? 그럼 넌 뭐지? 너 역시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자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난 대의를 가졌고 또 난 적어도 아이를 어른들의 일에 끌러 들이지는 않아. 아이를 미끼로 삼아 문서를 훔치려는 건 로 너 네가 아니었나?”


무진의 눈이 번뜩였다.

“.... 그게 나라를 위한 거라면.”


영식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무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 욕심이었어. 처음엔 아니었겠지만, 이젠 그렇지.”

한때 영식은 이들을 돕던 동지였다.
하지만 학도병으로 끌려간 동생과 부모를 볼모 삼은 일제의 협박 앞에 그의 마음엔 틈이 생겼다.
그리고 권력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그 틈을 벌렸다.

“더는 아이를 괴롭히지 마."

"괴롭혀? 내가?"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지... 특히 아이는 더욱...."

"자넨.... 아이의 행방을 묻지 않는군....

이미 아이를 찾은 게로군...."

"찾았지..."

"그럼 알 거 아닌가? 내가 아이를 얼마나 안전하게 보살피고 있었는지...."

"보살폈다? 아이를 유괴해 방치한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지...."

"내가 그리하지 않았더라면 모자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 쫓기던 그녀가 불을 피우지 않았나?"

"더 긴말하지 않겠어."

"으흥...."
"그나마 아이를 안전하게 데리고 있었기에 경고로 끝내는 거야.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가 될 거야.”

무진은 돌아서며 말했다.

“우리는 싸우고 있지만, 모두가 적은 아니야.
하지만 넌 경계를 넘고 있어. 멈춰.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말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식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무진의 말이 칼날처럼 등을 긁고 지나간 듯했다.

그날 밤, 영식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귀에 맴도는 것은 단 하나....
무진의 말이었다.
“너는 경계를 넘고 있어.”




춘식이는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봉투 안에는 종지기 서당에서 몰래 써 내려간 낯선 글씨들이 담겨 있었다.
그건 순이가 어릴 적 춘식에게 가르쳐 준 글자들이었다.
‘엄마’라는, 너무 오래 참았던 그 단어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춘식아…!”
순이의 목소리는 터질 듯 북받쳐 올랐다.
그 순간, 아이는 뛰어들었다.
허리를 감싸며, 작은 몸이 커다란 품에 폭 안겼다.
이 세상이 사라져도 좋을 만큼 단단한 순간이었다.

“보고 싶었어, 엄마…”

“나도… 나도…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서늘한 봄바람이 폐허 같은 공장 벽 틈으로 흘러들었지만,
그 품 안은 따뜻했다.

그들의 뒤편, 무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도현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성규 선생은 고요히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시간이야.”




그날, 순이는 영식과 작별했다.
그가 가슴에 무겁게 품고 있던 갈등과 욕망,
그 모든 것을 말없이 내려두고 그는 떠났다.
더는 미련도, 용서도 남지 않았다.
그건 누구의 죄라기보다, 시대가 남긴 비극이었다.



드디어 지하기지가 완성되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철문은 옛 창고의 가판대 밑에 숨겨져 있었다.
지문인식도, 비밀번호도 없었다.
오직 엿기름 항아리를 열고,
그 아래 단지를 돌려야만 열린다는 고풍스러운 방식.

“이제 여긴, 우리 모두의 집입니다.”



백성규 선생이 조용히 선언했다.
선교사의 명의 아래 등록된 이 공간은
일제가 감히 손댈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 안에 피어난 독립의 씨앗이었다.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공장의 명의 이전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도장을 찍는 순간, 순이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공간은 이제 모두의 것이 되었다고.


그리고 순이는 남편의 뒤를 이어 엿공장 운영에 돌입했다. 지하에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계획이 공유되었고, 지상에서는 달콤한 엿 향이 퍼졌다. 엿판 위로는 봄 햇살이 내리쬐고, 그 밑으로는 조용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칠후, 순이는 지상의 공장을 맡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윤석이 남기고 간 엿공장의 전통 방식은
손끝에 아직 살아 있었다.


찹쌀을 불리고 누룩을 이겨내고
엿기름을 넣은 솥이 고요히 끓어오르면
그 향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마치 새로운 시대의 약속처럼.

아이들이 줄지어 와서
엿을 한 조각씩 받아 갔다.
그리고 돌아서는 아이들 손엔
조그만 쪽지가 들려 있었다.

“여기서 배우는 건 단지 단맛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작고 단단한 희망입니다.”



순이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맑았다.
굳은 땅을 뚫고 피어난 민들레처럼,
그들도 살아남아 피어오르리라.
설령, 이름이 사라질지라도.




지상은 평온했다.
하지만 지하에서는 희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솥뚜껑을 열자,
엿기름이 우러난 황금빛 물이 천천히 넘실댔다.
순이는 젓는 막대기를 꼭 쥐었다.
엿의 단맛이 익는 동안 세상의 쓴맛이 조금은 씻기길 바라며.

춘식이는 그 옆에서 쌀가마니를 정리하고 있었다.
손놀림은 아직 서툴렀지만 눈빛은 다부졌다.

“엄마, 나도 해볼래.”

순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네가 젓는 날이네.”




지하는 점점 숨결을 되찾고 있었다.
도현은 무진과 함께 수송로를 정비했고,
백성규 선생은 탈출 경로 지도를 수작업으로 다시 그리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기지는 단지 숨는 곳이 아니었다.
출발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엿상자 속에 숨겨져 외국 선교사를 통해 몰래 전달된 것.

“하얼빈 거점이 노출됨.
서울 지부 급히 이전 필요.
경성 쪽 연락망으로 한 인물 파견 예정.”

그 편지를 본 무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순이에게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는 걸.


그날 밤, 순이는
지하 회의실 바닥에 앉아 남편의 유품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낡은 사진 한 장, 그리고 손때 묻은 도장이 들어 있었다.

“여보....
당신이 지켜낸 건 공장만이 아니었어.
그건 바로 이 사람들의 살아갈 길이었구려…”


순이는 이튿날, 엿공장을 다시 열었다. 동시에 지하의 비밀 회의실에선 서울 지부 이전을 위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이 거점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고, 향후 연합 거점 확보와 명의 이전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무진, 백 선생, 도현 등 많은 이들이 참석하였다.


“이 거점이 조만간 발각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대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긴 이미 우리 모두의 집이지만, 이제 너무 눈에 띄게 되었소. 서울 지부는 즉시 철수해야 합니다.”

순이의 표정이 굳어간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엿공장을 지키면서도
내부 지하 조직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는 양면 책임자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상부에 연락해 이동 경로를 조정하고,
다음 지부 이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얼마의 시간이 있는 것입니까?"
"연락망에 의하면 우리의 철수는 3일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날 밤, 순이는 지하 회의실 바닥에 앉아
백 선생과 무진, 도현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이미 공장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시선들도 감지되고 있었다.

“아닙니다. 서울 지부는 이틀 안에 철수해야 합니다.”


백 선생의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 공장은 우리 모두의 집이었지만, 이제는 더 큰 조직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순이는 잠시 침묵했다.
지하 문서함을 꺼내 작은 봉투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 안엔 이곳 거점의 기록과 엿공장 재무 흐름표가 담겨 있었다.

“이 공장은 제가 계속 맡겠습니다.
위장 공장으로서 역할을 잃지 않게 하겠습니다.”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팀은 북쪽 경유로 움직이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서울 지부의 거점 이전은 시작되었다.


keyword
이전 13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