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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조용한 1년, 지하로 흐르는 불꽃

by Unikim

장 씨 댁에 머문 첫날, 순이는 벽에 걸린 ‘정심당(靜心堂)’ 현판을 오래 바라보았다.
‘마음을 조용히 하라’는 뜻.
그 말처럼, 그 집에서의 하루하루는 조용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순이는 마당을 쓸고 춘식의 옷을 기웠다.
장 씨 댁 안살림을 거드는 듯했지만 늘 시선을 피하며 움직였다.
장 씨는 많은 걸 묻지 않았다.
다만 멀찍이서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춘식은 종지기들과 글씨를 배우고 종종 대청마루에 앉아 목판을 닦았다.
하지만 순이는 단 하루도 그 집에 몸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 적이 없었다.

밤이 되면 그녀의 손은 바빠졌다.
지게에 실려 들어온 종이더미, 버려진 공책, 뒤뜰 서고에 방치된 고문서 뭉치.
그 안에서 순이는 잊힌 ‘조각’들을 하나둘 맞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래전 춘식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엿공장 문서의 파편이었다.
일제강점기, 한때는 엿공장이었지만 지하에 은밀히 만든 비밀 창고가 있었다.
그곳은 독립운동자금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 흔적을 간직한 숨은 연결로였다.

그러나 공장의 명의는 이름도 낯선 일본 상인의 소유로 조작돼 있었다.
서류의 상당 부분은 찢기고 불에 그을려 있었고 이권은 친일 인사에게 넘어간 듯 보였다.

하지만 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하나 글자를 맞춰내며 공장의 진짜 소유권을 되살려냈다.

문서가 완성되던 날은 초겨울 바람이 거세던 날이었다.
순이는 장 씨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인장 하나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저희도 떠나겠습니다.”

장 씨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 눈빛엔 망설임도 미움도 없었다.
그저 세상에 하나 더 올려질 발자국을 묵묵히 바라보는 듯한 눈.

그는 붓을 들어 인영(印影) 옆에 이름 석 자를 남겼다.

순이는 작은 짐에 서류 뭉치를 넣었다.
그것은 공장의 실질 소유권 문서이자 지하기지를 지킨 마지막 증거였다.

대문을 나설 때 장 씨는 마루 끝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하루, 눈발이 조용히 흩날렸다.
그 속에서 순이는 스스로의 발을 똑바로 디뎠다. 더는 쫓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며칠 후, 순이는 새벽 첫 기차를 타고 공장터로 향했다.
먼지에 뒤덮인 철제문 앞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청년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암호처럼 속삭였다.

“산은 죽어도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꽃은 눈 아래에서도 살아있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자 순이는 조용히 도장을 꺼내어 공장 소유권을 담은 서류를 내밀었다.
그들이 가져온 문서와 맞교환하고 정확한 위치와 도면을 넘겼다.

공장은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단체의 손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벽 뒤의 철문은 그날 처음으로 7년 만에 열렸다.

그러나 일이 순탄히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언뜻 익숙한 사투리로 통화를 하던 목소리를 순이가 들었다.

“공장 주인이 나타났어. 우리 편? 아니야. 여자가 주도했어.”
“… 대가를 받아내야지.”

순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들 안에 누군가 일제의 정보망과 연결된 자가 있었다.

그리고 곧 장 씨 댁 근처에서 수상한 사내 둘이 종들을 몰래 추궁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장 씨 댁의 대청 끝 장 씨는 조용히 붓을 놓고 말했다.
“이 집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의 발길을 묵묵히 받아들여 왔다. 하나... 이번엔 다르구먼.”

순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장 씨 댁의 서고엔 여전히 서책과 족보와 오래된 기억들이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건 그 어떤 명분도 용납되지 않았다.

“춘식아, 가자.”

그날 밤, 순이는 아이 손을 잡고 뒷문으로 나섰다. 불빛도, 인사도 없이.
장 씨 댁 마당 한가운데 아무도 없는 눈밭에 마치 누가 지나간 것처럼 얕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발은 그쳤지만, 땅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장 씨 댁을 나온 순이와 춘식은 깊은 밤, 산을 넘어 조용한 암자에 도착했다.

그 암자는 세월에 닳아버린 기왓장 위로 보름달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암자에는 허리 굽은 노파가 홀로 살고 있었다.

무릎이 굽은 노파는 순이를 한눈에 알아봤다.
순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현수… 딸이지?”

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글 썼겠구나. 너희 엄마랑 똑같이... 목숨 걸고.”

순이는 아무 말 없이 불가에 앉았다.
노파는 장작을 넣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숨으러 왔으면 불을 피워선 안 되는 법이다.”


순이는 춘식이와 함께 이틀을 그렇게 그곳에서 버티었다.

이틀이 지난 그날 밤 순이는 품속 깊이 숨겨둔 보자기를 꺼냈다.

그 안엔 암호 해석표 그리고 공장 지하기지의 구조를 설명하는 문서 한 장과 윤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새 공장의 소유권 문서 조각 일부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셋째 날 새벽, 춘식이 보이지 않았다.

“춘식아!”


얼음 밟는 소리가 산 아래로 번져 나갔다.

순이는 맨발로 뛰쳐나가 절 아래 오솔길과 황량한 벌판을 헤맸다.

아이는 없었다.
대신 그 길 끝, 작은 바위 아래 붉은색 목도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순이… 너 살아 있었구나.”


순이는 뒤돌아섰다. 그곳에 영식이 서 있었다.

거칠어진 눈빛, 굳은살 박힌 손.

언젠가 함께 지하신문을 나르며 나라를 위해 일하던 사람.


“아이, 괜찮다. 우리 조직이 데려갔다.

위험할까 봐 일부러 떨어뜨려 놓은 거야.”

“무슨 소리야… 춘식이는…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너, 다시 필요해졌거든. 그 암호표, 너는 해석할 수 있잖아. 너희 어머니처럼.”


순이는 단단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 암호문은 일제의 작전기지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였다.

그녀는 아이의 안전을 먼저 확인해야만 했다.


“해볼게. 하지만 먼저 춘식이가 안전한지 확인해야겠어. 그리고 춘식이를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영식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우린 지금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이야. 이 나라를 위해 우리 부모, 형제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지. 너의 아이도 반드시 지켜줄게. 그리고 지금은 감시하는 눈이 있어서 너를 아이에게 데려가는 게 쉽지 않아. 아이가 안전하다는 것은 곧 보여 줄게. 지금은 조직의 임무가 먼저....”

그날 밤, 순이는 허름한 등불 아래 앉아 손끝으로 오래된 문자를 더듬었다.


종이에 새겨지던 암호의 첫 줄이 그녀의 떨리는 손끝에서 또렷이 되살아났다.


“밤이 길수록 새벽은 가까워진다.”


아직 눈은 녹지 않았다.

산자락을 덮은 희뿌연 기운 속에서 순이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손끝으로 되짚고 있었다.

“그늘 아래서도 뿌리는 자란다.”

그 문장 뒤에는, 정해진 암호표가 없으면 풀 수 없는 좌표 한 줄이 남겨져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해독한 암호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정보 하나로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도 잃게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사흘 안에 통영에 도착할 수 있어.”

영식이 펼쳐든 지도 위, 붉은 선이 그려졌다.

“다른 연락책과 같이 가라.”
“아니. 혼자 갈래. 그게 안전해.”


순이는 눈을 피했다.


“아이도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았고… 누굴 믿을지 모르겠어.”

영식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젠 너도 누군가를 의심할 줄 아는구나.”

그날 밤, 순이는 외투 안쪽 깊이 서류를 넣고 동산을 넘어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작은 강을 건너고 나무 사이 길을 지나던 그 순간......
기척이 따라붙었다.

바람은 멈췄지만 자신의 그림자 뒤에 또 다른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순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산 중턱의 허름한 폐가로 몸을 숨겼다.
낯선 발소리가 다가오다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레 발을 떼고 사라졌다.

다시 기지로 돌아오자 기척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조직 내 일부는 순이를 노골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에 한 번 잡혔던 자잖아. 누굴 팔았는지 모르는 일이지.”
“아이를 미끼로 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영식은 중립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예전처럼 단호하지 않았다.

그날 밤, 순이는 숙소 안에서 우연히 영식의 자료 더미를 훑다가 자신이 해독한 것과 다른 구조의 암호문을 발견했다.

같은 정보.
그러나 문장 순서가 어긋나 있고 중간 좌표가 거꾸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건... 누가 일부러 틀리게 만든 거야.”

그 순간, 그 종이 뒤에 끼워진 작은 종이 조각 하나.
거기엔 낙서처럼 그려진 동그라미와 별표가 있었다.

그건 분명 춘식이 그리던 장난그림이었다.


순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춘식이가 지나간 흔적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용히 기지를 돌아보았다.

안을 둘러보고 또다시 밖을 둘러보았다.

기지의 뒷문을 나가 창고가 있는 곳에 막 도착한 순이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려다 입막음을 당했다.


"쉿... 나야. 무진이..."

"여긴 어떻게...."

"계속 너를 주시하고 있었어. 널 따라다녔다는 말이야."

"왜?"

"알잖아. 이 안에도 밀정이 많이 숨어 있다는 거..."

"의성 공장은 독립운동단체에 소유권을 넘겼어요."

"수고했어. 그런데....

그 공장은 우리에게 넘어오지 않았어. 밀정에 의해 중간에 밀고되어서 결국 저들에게 빼앗겼어."

"그럼..... 여기까지 온 이유가?"

"맞아. 길안에 새로 지어 놓았던 마지막 공장마저 저들 손에 내어 줄 수 없잖아.

그래서 비밀리에 일을 추진해야겠다서....."

"그럼?"

"백성규 선생님이 보내셨어."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

"답을 가져왔어."

"답이라니?"

"네가 조각이 모두 맞춰져야 한다고 했잖아. 지난번에..."

"응...."

"그 조각 모두 찾았어."

"찾았어?"

"응. 찾았어."

"어떻게...?

찾을 수 없었을 텐데...."

"아니.. 찾았어."

"어디서? 아니 어떻게?"

"너"

"나?"

"응. 너... 퍼즐은 모두 셋..."

"세 조각으로 나눠져 있던 문서의 조각을 모두 맞춰서 네가 가진 도장을 찍으면 되는데..."

"응.... 그런데? 그 조각을 모두 찾은 거야?"

"아니... 처음부터 닻을 필요가 없었어. 모두 네가 알고 있었으니까...

하나는 백성규 선생님에게... 또 하나는 땅 속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너에게 남긴 선생님의 수첩 속에 들어 있었지.... 처음부터 네가 거기에 넣어 두었고 또 찾아서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왜 그렇게 생각을 하지?"

"백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조각에 단서가 있던걸....

넌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던 거야. 맞지?"

"맞아.... 내가 가지고 있었어. 윤석 씨의 뜻이 잘 이어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지...

이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 이번엔 공식적으로 우리 뜻을 이룰 수 있을까?"

"물론이지... 이번엔 확실히 뜻이 이루어질 거야."

"어떻게?"


"우린 길안 동장의 명의를 외국 선교사 명의로 등록을 할 거야.

윤석 사장님과도 인연이 깊은 분으로 믿고 맡겨도 될 분이야."

"외국 선교사?"

"응... 맞이. 외국(인) 선교사....

토마스 그분이라면 믿어도 된다.

토마스나 아님 그분의 종교기관에서 공장을 인수한 것으로 등기하면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할 거야."

"아~~ 그런 방법이....

예전에 그분을 집에 초대한 적이 있어. 식사 대접을 했더랬지..."

"그랬구나!!! 어떻게 자리를 만들어 볼까?"

"응... 지금.... 지금 일을 진행하자.

아니 아니야... 춘식이를 먼저 찾아야 해. 춘식이가 어디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어서..."

"춘식이가 함께 있는 게 아니야?

"없어. 영식이 아이를 데려갔어."

"그럼 춘식이를 먼저 찾아야겠네."

"감시도 너무 심하고 춘식이의 행방도 불안하고... 빨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의 안전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

"영식이가 아이를 데려갔다는데 보여 주질 않아....."

"영식이 아이를.....

조직이 춘식이를....?"

"이곳에 아이의 흔적이 있었어.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내게 이곳에서 아이의 흔적만 보게 해 준 것 같은데.... 지금 주변을 찾고 있던 중이었어."

"쉿... 누가 나왔어."

"영식이야..."

"널 찾나 봐."

"잠시만...."


"날 찾아?"

"어... 안 보이길레..."

"춘식이의 흔적을 보았어. 혹시 이 근처에 있니?"

"아니야... 여긴 잠시 머물렀어. 지금은 더 안전한 곳에 있어."

"안전한 곳 어디?"

"조금만 믿고 기다려 줄래?"

"자식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마냥 기다리기만 하니?"

"물론 이해애. 하지만 우린 네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일이 마쳐질 때까지 너랑 아이를 보호하려면 이게 최선이야."


순이는 점점 불안에 휩싸여졌다.


“아이를… 내 아이를 보여달라고 했잖아! 내가 뭘 잘못했는데!”
순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이 솟구치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순이야, 지금은 보여줄 수 없어. 우리도 너도 위험해.”

“그 아이가 위험하다면, 내가 그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영식이 말을 이었다.

“공장의 도장. 네 남편이 남기고 간 문서 말이야.
너만이 찍을 수 있는 서명 자리에 지금 서야 할 때야.”

순이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결국 그거였어?
문서 한 장이, 아들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딩~딩~”


세 번 울린 종은 마치 말 없는 대답처럼 가슴에 울렸다.


조용히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무진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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