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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얼음 밑에서 들리는 것들

by Unikim

그날 안동교는 유난히 조용했다.
고요한 눈 위에 순이의 발자국이 끊기던 자리 춘식이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엄마...”

발끝에 힘을 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다리 밑 얼음 아래서 희미하게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춘식이는 순간 움찔했다.
살얼음 밑에 갇힌 냇물 소리였을까.
아니면 얼어붙은 안동 사람들 마음속.

속삭이던 슬픔이었던 걸까.

“춘식아!”
멀리서 순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녀는 다리 끝, 언덕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 아래, 옛 안동 권 씨 종택의 지붕이 겨울 볕에 엷게 빛나고 있었다.

“저긴... 아버지와 함께 갔었던 아제 집인데......?”
춘식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춘식은 아버지 윤석과 함께 안동 권 씨 종가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곳엔 안동 권 씨 종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잔치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춘식이는 납품을 하려는 아버지를 따라 그 집에 갔더랬다.

홀로 다리 위를 걷고 있던 춘식이는 아버지가 몹시도 그리웠다.


이는 얼어붙은 발바닥을 떼어 언덕을 향해 한 걸음씩 걸었다.
그 걸음마다 얼음 밑에서 ‘쨍’, ‘쨍’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그것은 겨울이 끝나간다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찬 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가 춘식의 귓가에 속삭였다.
“춘식아~ 춘식아~

일어나...

어서 엄마를 향해 가렴......”

춘식이는 희미해져 가는 엄마의 자취를 따라 살기 위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걷고 또 걸었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그는 그렇게 힘겹게 다리를 건넜다.


안동교를 막 다 건너던 그 순간....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이 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식이는 혼자 그 눈 쌓인 길을 걸었다.
추운 겨울이었기에 아이의 마음속엔 불안과 두려움이 더욱 겹겹이 쌓였다.
“조심해, 춘식아.”
멀리서 순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그는 그 소리에 마음을 전부 담을 수 없었다.

걸음이 무거워지고 춘식은 그만 휘청 넘어지고 말았다.
얼어붙은 눈밭에 그대로 누운 춘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져야 해.'


눈을 털고 일어나며 춘식이는 주위를 들러 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춘식이는 그렇게 주변을 한참 동안 둘러보며 엄마를 기다렸다.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리던 춘식이는 좌절된 채 중얼거렸다.


'없어. 엄마가...

엄마가 혼자 가 버렸어.....'


짧게 한탄을 뱉어 내던 춘식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서 순사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순이는....

순사가 사라진 직 후 순이는 쓰러진 춘식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리고 춘식이를 단단히 안고서 어둠 속 초가집 문을 조심스레 두르렸다.

초가집 문이 열리자 낡은 기와와 삭막한 겨울 햇살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할머니는 혼자 사는 듯 몹시 가난해 보였다.
허름한 방 안에는 겨울을 견디기 위한 낡은 이불과 먼지 쌓인 항아리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춘식과 순이는 그렇게 그곳에서 야윈 할머니와 어린 여자아이와의 짧은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날 다리 아래 얼음 밑에서 들리던 ‘쨍’ 소리는 어쩌면 두 사람의 운명을 알리는 시작이었을지도.....


할머니 혼자 사는 초가집은 가난하고 쓸쓸했다.

무너진 담장 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고 벽에는 곰팡이 핀 종이장이 들썩거렸다.

순이는 집 안에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춘식이의 젖은 옷을 벗기고 입김을 불며 그의 손을 감싸주었다.

할머니는 마른 손으로 국을 덜어주며 말했다.


“먹을 것이 변변 찮네.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이거라도 드셔 두시게. 그래야 아이 간병을 할 것이 아닌까?”


순이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이 집에 더 머무는 것이 민폐인 걸 잘 알았지만 그 상황에선 그곳 말고는 머무를 곳이 없었다.


“얘야~ 괜찮니?”


초가집 안 할머니가 손수 내민 따뜻한 국물 한 그릇....
순이는 춘식이의 땀에 젖은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다.

할머니는 마른 손으로 춘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위고 초췌한 모습의 고령의 할머니...
그녀를 바라보는 순이는 힘들게 사시는 분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라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 역시 쫓기는 신세라 마음뿐 큰 힘이 될 수 없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순이는 조용히 산으로 향했다.
눈 녹은 산비탈에서 겨우 얼굴을 내민 나물을 뜯으며 생각했다.
‘이것이라도 가져다 드리면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버티실 수 있겠지.’

순이는 눈 속을 헤치며 캔 나물 일부를 할머니가 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내주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할머니는 쌀을 사고 그 쌀로는 할머니와 민희 그리고 순이와 춘식의 굶주린 배를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춥고 외로운 겨울의 끝자락..

그렇게 그들은 한 달 가까이 그 초가집에서 그리 함께 살았다.

그렇게 한 달.

계절은 바뀌어 갔고 초가집 안도 사람의 온기로 조금씩 따뜻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꼬마 아이가 순이에게 다가와 작은 쪽지를 건넸다.
조심스레 펼쳐보니, 그곳엔 친정어머니 현수의 글씨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장 씨에게 가거라.
벼슬아치인 장 씨는 널 도울 수 있을 거야.’


손끝이 떨렸다.

현수, 어머니였다.

순이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은 그쳤지만, 회색빛 하늘은 말이 없었다.
순이는 망설였다.
하지만 춘식의 미래와 안전을 위해 이를 따르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짐을 챙겼다.

춘식은 말없이 순이를 따라나섰고 그들의 발자국은 다시 눈길 위에 조심스럽게 새겨졌다.

순이와 춘식은 눈 덮인 길을 그렇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안동 장 씨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안동은 오래전부터 세 가지 성씨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크고 힘 있는 집안은 권 씨(權氏)였다.
임진왜란 때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권율 장군의 후손들이 살았고 그들은 성리학과 충절을 숭상하며 안동 지역에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또 다른 명문 가문은 김 씨(金氏)였다.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집성촌을 기반으로 병자호란 때 굳은 절개를 보인 인물들이 이 성씨에서 나왔다.
그들은 조선의 학문과 정치계에 깊숙이 자리 잡아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장 씨(張氏)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학문을 중시하며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들이 많았다.
안동의 선비 문화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벼슬아치들도 이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순이는 이 세 성씨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어쩌면 이 집안들이 자신의 미래에 얽혀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했다. 순이는 그렇게 불투명한 미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장 씨의 집은 초가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널찍한 대문과 곧게 뻗은 기둥들이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중기 대유학자 장현광의 후손이라 불리는 이 집은 학문과 가풍으로 안동 일대에 이름이 높았다.

“어르신, 전 현수댁 순이라 하옵니다. 이 아이는 제 아들 춘식이고요.”

순이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장 씨는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선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바람을 오래 본 이의 눈처럼 담담했다.

“밥은 먹었는가?”

그 한 마디에 순이는 목이 메었다.

장 씨 댁에서의 생활은 전과 달랐다.
순이는 새벽마다 마당을 쓸었고 춘식이는 종지기 아이들과 함께 붓글씨를 익혔다.

하지만 늘 누군가의 시선 속에 있었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서늘했다.

장 씨의 부인은 순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저런 과부 하나 받아들였다간 집안 꼴 안 봐도 뻔하지…”

하지만 장 씨는 한결같이 순이 모자를 보살펴 주었다.

순이는 장 씨 집안에 보은 하려 장 씨 부인의 일들을 거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장 씨 부인의 마음도 누그러져 순이 모자를 곱게 보기 시작했다.
오히려 순이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조용히 책상 한쪽에 마른 나무껍질과 종이를 놓고 글씨를 써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순이는 조용히 펜을 잡았다.
산에서 캤던 나물 이름, 눈길을 걸으며 들은 얼음 밑의 소리들, 춘식의 잠든 숨소리까지
하나하나 마음에 새겼던 것들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나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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