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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건 꿈일 거야

by Unikim

세 사람은 집을 떠나 논두렁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달빛은 여전히 흐리고 먼 하늘 어귀에서 부는 바람이 냉랭했다. 춘식이는 순이의 등에 업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 저 숲 지나면 작은 냇물이 나와. 그거 건너면 바로 우리 이모네 집이야.”

순이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철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를 어느새 영이가 조심스레 따랐다. 그녀는 손에 꼭 쥔 보자기를 품 안에 더 깊숙이 넣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쉿, 거기서부터 조심해야 해.”

세 사람은 걸음을 늦췄다. 순이는 철이에게 손짓하며 우회로를 가리켰다. 오래된 돌담과 황폐한 밭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조그만 초가집 하나가 어둠 속에 윤곽을 드러냈다.

“이모!”

순이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에서 등불이 흔들리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누구요……? 아이고, 순이냐? 이런 밤중에…”

이모는 흠칫 놀라더니 곧장 네 사람을 집 안으로 들였다. 순이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모…"

"안다. 니그 어무이 연통받았다."

"우리 당분간만 여서 좀 재워주세요. 갈 곳이 정해지면 떠날게요.”

“아이다. 괘안타. 머물고 싶은 만큼 편하게 머물러도 된다. 어서 들어온나. 애기 감기 걸리겠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이모의 집으로 들어갔다.

순이의 등에서 내려진 춘식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만 껌먹 거렸다.

이모는 꽁꽁 얼어있는 어린 춘식이가 감기에라도 걸릴세라 아이를 이불이 깔려 있는 아랫목으로 데려갔다.
춘식이는 그렇게 순이의 이모 손에 이끌려 이불속으로 들어갔고 순이는 그 옆에서 보자기를 풀어 이모 앞에 내밀었다. 감자와 고구마, 쫑쫑 썬 나물과 그 가운데 놓인 금가락지 하나 보자기 안에 들어 있었다.

“이건…?”

“어머니가 주셨어요. 잘 간직하래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이걸로 저희 목숨을 구하라고....”

이모는 말없이 금가락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것을 들고나가서 장독대 밑에 감췄다.

“여기 감춰 뒀다가 꼭 필요할 때 쓰련....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어서 자자”

그날 밤, 순이는 이불속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철이는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고 영이는 누워서 손을 꼭 모은 채 하늘을 떠올렸다.

‘이 길이 끝이 아니기를…’


다음 날, 철이와 영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순이와 춘식이만 순이의 이모집에 남았다.


" 이모~ 삼베라도 짜 신세를 갚을게요.

"뭔 소리가? 우리가 남이가? 일단 며칠은 아무 생각 말고 쉬그라..."

"생각이 너무 많아가 그래요. 뭐라도 하면 생각이 좀 비워질까 싶어서.."

"그래도 지금은 쉬거라. 긴 싸움이 될 것이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 아니냐~ 그저 이모 집에서는 편히 쉬거라."


이모의 도움으로 순이와 춘식이는 차츰 마음에 안정이 깃들었다.


그렇게 이모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인근에 사시던 이모의 시아버지께서 방문을 하셨다.


"누꼬?"

"제 조카입니다."

"이 아그는?"

"조카아이의 아들입니다."

"그놈 참 잘 생겼네... 잘 쉬다 가그라..."

"고맙습니다. 조금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 남도 아니고 잘 지내다 가시게...."


그렇게 순이는 이모집에 벌써 3개월간 머물렀다.
러던 어느 날.....
이의 이모가 시장에 잠깐 다니러 갔을 때였다.
그 잠깐 사이, 이모의 시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는 작은 보따리를 내밀며 낮게 말했다.

“이 집에 더 있으면 안 된다… 미안하다만, 나가야겠소.”

목소리는 떨리고, 눈은 순이 얼굴을 끝내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그 말만 남긴 채 그는 문지방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자신과 춘식이를 내쫓는 이 결정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그래서 순이도 더 이상 붙잡지도 매달리지도 않았다.

순이는 그저 춘식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한 손엔 짐을 들고 다른 손으론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툇마루로 나왔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가기 위해 춘식이의 신발을 꺼내 막 신기려던 찰나였다.

저 멀리,
골목 어귀에서 순사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길이 멈추진 않았지만 분명히 힐끗.....
순이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그 순간... 이모의 시아버지 눈빛이 순이의 뇌리에 박혔다.
그건 ‘겁’이었다.
침묵으로 내뿜는 일본 순사의 위압감.
그가 감당하지 못할 공포였다.

그러니까 그는 두려움 때문에 이모가 없는 틈을 타 두려움을 해결할 기회를 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순이와 춘식이를 쫓아내어 일본 순사가 건네는 위압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들이 큰길로 나오자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렸다.
춘식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순이의 손에 매달리듯 붙어 걸으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순이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겨우 걷던 작은 다리는 떨렸고 그녀의 품에 파묻힌 춘식은 숨죽여 흐느꼈다.

“엄마, 어디 가는 거야...?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찔렀다.
순이는 울컥하는 속을 꾹꾹 눌렀다.
말 한마디라도 꺼내면 감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저....

춘식을 안고 걷는 것만으로도 벅찬 순이였다.


잠사 후 순이는.....

“괜찮아, 우리... 괜찮을 거야...”

그렇게 중얼이며 순이는 춘식과 자신에게 다짐처럼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꿈일 거야....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엄마... 엄마....'


순이는 맘 속으로 계속해서 엄마를 불렀다.

망막한 순이는 연이은 한숨과 함께 눈물을 글썽거렸다.


'엄마에게 가야 해..

아냐... 엄마를 더는 곤란에 빠지게 할 수는 없어.

그럼 어쩌지? 어떡하지?

엄마한테...

아니야. 안 돼.

그럼 어디로....

아니야~~~

엄마가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순이가 곤란에 처할 때면 언제든 현수는 그녀 앞에 나타나 순이를 감싸 안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기에 현수는 미처 이 일을 알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순이는 그 말을 믿어야만 겨우 버틸 수가 있었다.

이미 엄마인 그녀이지만 두려움과 막막함 앞에서 그녀는 마냥 엄마의 아이이고 싶었다.

그렇게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품고 엄마를 향한 믿음과 사랑에 기대어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을 내 디뎠다.

이 거친 상황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린 20대 중반의 서툰 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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