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의 고백
“백성규 선생님… 그날, 기억하시죠?”
순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진과 도현이 자리를 비운 폐교 안 낡은 책상 위엔 찻잔 두 개가 식고 있었다.
순이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방 안의 공기를 가르기엔 충분했다.
성규는 아무 말 없이 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윤석 씨 방이었어요.
찻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문이 살짝 열려 있었죠.
선생님과 윤석 씨가 마주 앉아 계셨고...
두 분은 뭔가 무거운 얘기를 나누고 계셨지요.
그때 책상 서랍을 여는 소리가 났어요.
그리고 그이는 무언가를 꺼내 선생님께 건넸죠.
그건 어떤 문서 같은 거였어요.
선생님께서는 그 종이 한 장을 조심스레 선생님 품에 넣으셨어요.
그게.... 그 문서 맞죠?”
순이는 오래전 윤석의 방으로 차를 들고 조용히 들어가려다 윤석과 백성규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다.
"저 그 문서, 혹시... 윤석 씨가 백성규 선생님께 남긴 그 문서 아닌가요?"
백성규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지만 곧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찢어진 문서 조각을 꺼냈다.
어쩐지 낯익은 문서 조각. 순이는 가만히 다가가 그 종이 조각을 바라보았다.
“... 봤군요.”
“그땐 무슨 문서인지 몰랐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백성규 선생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찻잔을 덜컥 내려놓고 순이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이건 그 문서의 일부죠. 그가 내게 건넨 마지막 조각. 나머지는... 두 번째 조간은 순이 씨가 가지고 계시지요."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문서가 담고 있는 진실은 그저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들의 생존과 독립운동의 향방까지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왜 아까는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무진 오빠도, 도현 씨도 다 있었는데...”
“... 그날 이후로 난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성규는 윤석의 마지막 말을 떠 올렸다.
"가장 가까운 자를 조심하시게..."
"윤석이 그 사람이 내게 당부했지요. 가장 가까운 자를 조심하라고...... 물론 석지만 사장의 배신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겠지만 난 그의 그 말이 여기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래서였던 것 같습니다. 난 무진이를 그리고 도현 씨를.... 번갈아 의심했죠.
특히 도현 씨는 이상할 만큼 흔적이 없었어요.”
순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현 씨가....
그 부드러운 말투 뒤에 다른 얼굴이 있는 걸까?'
“그 문서... 이게 다 인가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찢긴 마지막 조각입니다..
이걸로 공장의 지하 구조까지 다 연결됩니다.
윤석이 왜 그 공장을 지키려 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도.”
“지금이라도 의광회에 넘겨야 하지 않을까요?
더 늦기 전에...”
“아직은 안 됩니다.
도현 씨가... 만약 그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윤석처럼 또 누군가 죽게 될지도 몰라요.”
폐교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순이의 가슴속엔 무거운 긴장감이 자리 잡았다.
그때,
조용하던 복도 저편에서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
순이는 본능적으로 성규를 바라봤다.
“숨기세요, 선생님.”
백성규는 재빠르게 문서를 다시 품에 넣었다. 순이는 차를 들고 있던 손을 고쳐 쥐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리며 도현이 들어왔다.
"차가 다 식었네요. 바깥은 좀 어떤가요?"
"조용합니다. 모두들 갔나 봅니다."
"그리 쉽게 포기할 리가 없어요."
"무진 오빠는요?"
"곧 올 겁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고 있는 도현을 바라보는 순이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도현 씨...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반문해 보았다.
“그 도장은요?”
도현의 물음에, 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장 지하에 감춰졌던 독립운동 기지,...
문서...
그리고 그 문서를 완성할 마지막 조각.....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도장.....
그녀는 지금 벌어지는 있는 이 상황들이 무섭고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꺼낼 때가 아니었다.
"아시는 것처럼 도장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질 때까지는 도장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들 사이에 묘한 적막이 흘렀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바깥 낌새가 이상합니다."
도현의 목소리엔 경고가 섞여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는 바깥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조용한 목소리로 알렸다. 그의 돌변에 백성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순이도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최근 도현의 태도엔 어딘가 모를 의심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규 역시 도현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고 밀정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 분 뒤, 무진이 숨 가쁘게 뛰어들며 상황은 급변했다.
"다들 조심하세요! 일본 경찰들이 이 주변을 포위했어요. 누군가 내부 정보를 넘긴 것 같아요. 지금 폐교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무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물 바깥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백성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실 지하, 비밀 통로로 갑시다. 여긴 곧 들이닥칠 겁니다."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이, 무진, 도현, 그리고 백성규까지. 그들 모두는 교실 아래편에 숨겨진 비밀 통로로 향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순이의 눈은 도현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도현이 맨 뒤에서 뒤쫓아오던 일본 경찰 하나를 제압하며 말했다.
"이쪽입니다! 제가 유인하겠습니다. 순이 씨, 어서 가세요!"
"왜? 어째서?"
"전 조선인입니다. 일본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임을 얻어야 했기에 밀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중 밀정입니다. 하지만 난 조선인입니다. 내 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지요. 내가 아니어도 저들은 밀정을 끊임없이 만들어 보낼 것이기에 차라리 제가 맡기로 한 것입니다."
"혹시 이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죠?"
"무진선생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제야 순이는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음을.....
도현은 단순한 밀정이 아니었다. 그는 이중 첩자였고, 일본의 정보를 빼내 조선 독립군에게 전달해 온 인물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도현은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며 순이 일행의 탈출을 도왔다. 그 틈을 타 무진과 백성규는 순이를 데리고 폐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폐교를 빠져나온 순이는 겨우 현수가 있는 그녀의 친정집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 집 역시 일본의 감시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미 그 일대엔 일본 순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불안해했다.
순이는 집 근처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마당 한편에 나와 선 철이를 발견했다. 철이 역시 단박에 순이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누나...?"
순이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철이야, 조용히. 춘식이 좀 데리고 나와.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어."
철이는 순이의 눈빛에서 긴박함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이는 영이와 춘식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춘식이를 안았다.
"이 밤에 아는 왜?"
"쉿!!"
영이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언니가 왔나?"
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춘식이를 조심스레 데리고 나온 그는 순이와 함께 뒷문을 통해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조용히 걷고 있는 그들의 뒤를 누군가가 조용히 뒤따랐다.
철이와 순이는 숨죽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엄마~"
춘식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반가워하는 춘식의 입을 철이가 빠르게 막았다.
"그래 가가 얼마나 가겠나...."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철이와 영이의 대화를 듣고 현수가 조용히 따라 나온 것이었다.
"어디로 가려고?"
순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 기별 넣어 놨다. 고개 너머 이모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이거 받거라."
순이는 현수가 건넨 보자기를 받았다.
"감자랑 고구마 쪼매 담았다. 그리고 이거....."
현수는 보자기에 이어 금가락지 하나를 순이에게 건넸다.
"잘 가지고 있다가 요긴하게 쓰거라."
"어머니.... 고맙습니다."
"꼭 살아라. 어쩌든 잡히지 말고 꼭 살아."
현수는 순이에게 당부를 하고 빠르게 집을 향해 걸어갔다.
현수가 떠난 후 달빛 아래, 세 사람은 조용히 밤길을 따라 다음 은신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