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밤
그날 밤,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유난히도 짙었다.
순이는 일부러 불을 더 세게 지폈다. 엿을 끓이는 솥에서 달큰한 향이 공장을 가득 메웠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는 충분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야 해….’
지금 이 순간, 무진과 도현, 그리고 백 선생과 관계자들이 서울 지부의 거점 문서를 북쪽으로 옮기고 있을 터였다. 이 연기와 소란이 그들의 그림자를 덮어줄 수 있다면, 순이는 공장의 피해가 생기더라도 상관없다는 각오였다.
“사장님, 불이 너무 센 거 아닙니까? 엿이 다 타버리겠습니다.”
“잠시 불 조절을 하세요. 잠시 줄였다가 엿의 달큰한 향이 온 동네에 가득 스미게 엿이 타기 직전 거지 고으셔요. 오늘은 엿보다 더 중요한 걸 지키는 중이니까요. 그래도 탄내가 나면 안 돼요. 가장 달고 맛난 향이 날 수 있을 때 까지만요”
순이의 단호한 대답에 공장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순이가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더는 이곳이 단순한 엿공장이 아니라는 걸 이 향이 단순한 달콤함이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잠시 불을 돌본 후 틈을 타 순이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 책상 서랍에서 조심스레 꺼낸 작은 상자.
남편 윤석의 유품이었다. 낡은 사진 한 장, 그리고 손때 묻은 도장.
“그 사람, 당신이 지켜낸 건 공장이 아니었어. 이 사람들의 살아갈 길이었지요.....”
순이는 유품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더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대신, 강한 결심이 몸을 채웠다.
윤석이 생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순이야, 엿공장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향이 될 거야."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이제부터는 그 희망을 내가 지켜낼 거예요.”
순이는 도장을 손에 꼭 쥐었다. 더는 과거의 슬픔에 매달리는 여인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독립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체가 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무진이 잠시 공장으로 들렀다. 그는 손에 묻은 흙을 닦으며 낮게 속삭였다.
“곧 출발합니다. 북쪽 경유로 움직일 겁니다.”
뒤이어 백 선생이 다가왔다. 얼굴에는 묵직한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굳세었다.
“순이, 자네가 있어 우리가 움직일 수 있었네. 공장은 그대로 지켜주게. 이곳은 우리 모두의 집이었지만... 이제는 더 큰 조직을 위해 지켜야 할 때일세.”
순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 공장은 제가 계속 맡겠습니다. 위장 공장으로서 역할을 잃지 않게 하겠습니다.”
백 선생은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손을 꼭 잡았다.
“잘 부탁하네. 언젠가, 이 엿 향기 나는 길 위에서 다시 만나리라.”
그 말은 곧 작별의 인사였다. 순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그들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긴박한 무진과 도현은 조용히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거점의 움직임은 일본군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 없었다.
새벽녘, 한 일본 순사가 북쪽 길목 근처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챘다.
“무진, 저놈이 수상해.”
“… 시간을 벌어야 해.”
그때, 공장 쪽에서 굴뚝 연기가 갑자기 크게 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연기와 달콤한 향으로 향했다.
“엿공장이 불이야!”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며 공장 쪽으로 몰려갔다. 그 틈을 타 무진과 도현은 문서를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진은 북쪽 산길에 들어서기 전,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공장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순이는 여느 때처럼 새벽부터 솥을 걸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이미 다른 각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엿을 끓이는 동안 작은 수첩을 꺼내어, 전날 밤 작성한 기록을 적었다.
이제 이 공장은 생계 수단인 동시에 지하의 비밀기지가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자금을 대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솥에서 달콤한 엿 향기가 피어오르자, 순이는 윤석의 사진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당신, 이제야 제대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이 작은 공장에서 시작된 이 향이, 언젠가 조국의 봄을 부를 거예요.”
1942년의 봄, 그렇게 순이의 싸움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