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서, 조용히 성공을 향하는 루나

“버티는 건 내가 제일 잘하니까, 이 정도쯤은 괜찮아요.”

by luna Han 윤영

낮 12시, 세비야의 햇살은 벌써 뺨을 타고 내려앉고 있었다.
오렌지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뒷골목을 돌아, 나는 기분 좋게 식당 문을 열었다.
영업 시작 한 시간 전, 가장 분주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 주방 아주머니가 말없이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가방을 메고 조용히 나가버렸다.

뒤따라간 동료가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손을 툭 뿌리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는 뒷모습이 세비야 정오의 햇살보다 더 또렷하게 남는다.

그 장면은 이 도시, 이 주방에서 이제는 낯설지 않다.


며칠 전, 사직서를 냈던 웨이트리스가 있었다. "새 직원에게 인수인계까지만 하겠다"고
말끝을 또렷하게 맺었던 사람.

하지만 토요일 밤, 5시간 근무를 마치고는 매니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피곤해서, 내일 일요일까지만 할게요."그녀는 내 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냉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나를 지나쳐, 탈의실로 나갔다.

말 없이 나가는 뒷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익숙해진 건, 내가 그걸 더 이상 붙잡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없이 떠나는 사람은 가볍지만, 그 자리를 수습하는 일은 늘 무겁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하루 일해보고 결정하자던 한 아주머니는, "내일부터 정식 출근하겠다"고 말을 바꾸고
다시 조건을 물었다. 그러더니 급여가 맞지 않는다며 사라졌다.

또 다른 지원자는 면접을 보고 출근하자마자, "하루 근무 시간이 너무 길다"며 퇴사했다.

여기는 하루 8시간이 기본이다. 초과하면 초과 수당을 준다.
그래서 대부분 8시간에 맞춰 일한다.
그런데 그 8시간이 길다고 하면—
정말, 그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이곳도 우리나라처럼 병가 제도가 있어 아프면 쉴 수 있고, 진단서를 제출하면 병가 처리가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겨우 3일 일한 뒤 병원에 다녀와서는, 침대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며

2주 진단서를 내민다.

처음엔 놀랐지만, 이제는 이런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다.


사람만 바뀌었지,
대사는 비슷했고,
그들이 떠나는 방식도 여러 가지였지만, 결국 남는 건 나였고, 그때마다 나는 더 바빠졌다.


6년쯤 하다 보니, 사람들이 떠나는 방식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다양한 듯 보이지만 결국 비슷하다.

나는 그 말들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처음 하는 말이겠지만, 내겐 너무 익숙한 끝맺음이다.

지치는 건,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일 한 자리를 여러 사람으로 채운다.
그 자리를 지키며 버티지만, 그 자리는 언제나 다시 비고,
그 자리에 남는 나만, 해야 할 일은 더 쌓이고, 손은 점점 더 바빠진다.


세비야의 오후는 빠르게 뜨거워지고,

주방 안의 열기는 그 뜨거움을 고스란히 품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나만 겪는 일일까.
아니면 지금 세상이 그런 걸까.

문득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요즘 너무 지쳐. 사람이 자꾸 바뀌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설명을 반복해.
나도 사람인데, 감정이 마르더라."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언니가 말했다.

"요즘은 여기도 마찬가지야. 다들 일할 사람 없어서 고생이야.
식당하는 언니 친구도 며칠 전에 사람 못 구해서 하루 종일 혼자 일했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그 말을 듣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게 위로가 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못난 게 아니구나’ 싶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요리학교에 다니며 일하는 K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사장님, 요즘 좀... 힘드시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버티는 건 내가 제일 잘하니까."

그 말을 듣고 K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장님, 이 시끄러운 거 다 지나고 나면요, 진짜 잘 되실 거예요.
버티는 사람이 결국 이기는 거잖아요."

"그래...? 정말, 나 잘될 운명인가 봐?"

그 말에 처음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정말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켜야 할 자리는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버티는 건 내가 제일 잘하니까. 이 정도쯤은 괜찮다고,
다시 한 번 나에게 말해본다.


세비야의 한복판,
나는 묵묵히,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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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안내

이 에세이는 실명으로 연재되는 회복의 기록입니다.
� Luna Han 윤영의 연재 일정

《이혼해도 괜찮아》 :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끝난 결혼,
이제는 나를 위해 입을 여는 이야기.

《루나의 세비야》 : 매주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도시,
세비야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진실, 유죄》 : 매주 목요일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죄가 되는 시대.
그럼에도, 말해야만 회복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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