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Luna Han으로 시작된 이야기
2019년 3월 7일,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
두 개의 캐리어와 강아지 다라,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Ricardo.
내가 향한 곳은 스페인이 아니라, 가족이란 품이었다.
2019년 3월 7일, 나는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이제 정말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강아지 다라와 함께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비행기를 탄 건 처음이라 직항이었지만 13시간은 참 길게 느껴졌다.
“다라는 어떡하지?”
이주를 결정하며 조심스레 물었을 때, Ricardo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족인데, 같이 가야지.”
그 말은 내 마음속 깊은 곳,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단어 하나를 다시 불러냈다 — 가족.
그는 내가 기르던 작은 강아지까지도 당연히 ‘가족’이라 부르며 품에 안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갑작스러운 울컥임에 목울대가 저려왔다.
기내에 데리고 탈 수는 있었지만, 옆 좌석 승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내심 걱정됐다.
고맙게도, 나란히 앉은 아버지와 꼬마 아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저도 개 키워요. 걱정 마세요. 화장실 자주 데려가시고, 가끔 꺼내주시면 돼요.”
처음 혼자 장거리 비행에 강아지와 잔뜩 긴장해 있던 내게, 그 따뜻한 말 한마디는,
한국을 떠나는 나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네주는 것 같았다.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오자, 또 다른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공항에 도착해 짐과 다라의 서류를 제대로 제출할 수 있을까?
케리어를 찾고 강아지 등록소를 찾아가며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Ricardo였다. 그는 공항 안까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중에 들었다. "와이프가 하얀 포메라니안을 데리고 오는데, 스페인어를 못 한다"고
직원들에게 사정해서 공항 내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 셋, 스페인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Ricardo가 미리 와서 계약하고 준비 중이던 식당이었다.
거의 마무리 단계일 줄 알았지만, 현장은 이제 막 시작한 듯했다.
매일 들러 확인해보니 인부들은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2시면 퇴근.
하루 5시간 작업이라니, 이 속도라면 1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매일 Ricardo를 통해 인부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렇게 밀어붙인 끝에, 5월 중순이 되어서야 식당 문을 겨우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벽이 있었다. 비자였다.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가족관계부를 받아두었기에, 당연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민청(Extranjería)에 서류를 제출하러 가서야,
내가 비자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해외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결국 남편 하나만 믿고 이곳까지 건너온 셈이었다.
낯선 땅의 시작은 예상보다 훨씬 더 고단했다. 매일이, 작은 시험이었다.
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겼다.
Ricardo가 다른 나라에서 보낸 20년의 시간은 그에게는 삶의 흔적이었지만,
우리에겐 비자라는 문턱 앞에 놓인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되었다.
추가서류를 제출하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화가 난 그의 말투는 단호했다.
“내 나라에서, 내가 결혼해서 와이프 비자를 받는 건데 왜 자꾸 서류를 더 내래?”
담당자는 묵묵부답.
그들의 ‘기준’ 앞에서 우리의 사정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민 전문 변호사를 찾았다. 수임료 500유로.
좀 비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확실한 게 필요했다.
“언제쯤 받을 수 있나요?”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질문에,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몰라요. 마드리드는 1년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세비야는 그보단 빠르지만요.”
나는 눈앞이 뿌예졌다.
이곳에서 행정적으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말,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고, 나중엔 화가 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마저 그냥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장 결혼도 아닌데, 설명하고 증명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참지 못하고 울었다.
식당은 계약했고, 내 명의로 사업자를 내야 오픈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정 절차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스페인 행정 시스템에서는 서류 하나 발급받으려면 예약(cita)을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전입신고(empadronamiento) 하나를 하려 해도, cita 예약은 보통 1~2주 뒤.
그때 가서 서류를 접수하고, 접수증을 받고, 필요한 서류는 또 다음 cita 때 받는다.
서류 접수하러 간 날, 나는 담당자에게 조심스레 재촉했다.
그러자 Ricardo가 한국 시스템을 설명했다. “한국은 바로 가서 서류 받아올 수 있어요. 5분 만에요.”
담당자는 내게 묻는다. "한국은 여름휴가가 며칠인가요?"
“회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일주일?”
“난 한국에선 못 살아~ 우린 한 달이거든.”
그러더니 직원들끼리 깔깔 웃는다.
‘공무원이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거잖아. 왜 국민이 당신들 스케줄에 맞춰야 하냐고…’
기다림은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일상이었고, 그 자체로 나날의 배경이 되었다.
느림이라는 이름의 이 나라는 이제 내가 살아갈 곳이다.
결국 5월, 그의 명의로 사업자를 먼저 내고, 비자가 나오면 내 명의로 바꾸기로 했다.
비자 문제로 지친 날들이 이어지자,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 비자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이민청(Extranjería)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Ricardo가 전화를 걸자, 비자는 그날로 승인됐다.
세비야는 여전히 인맥이 통하는 도시였다.
그간의 기다림은 도대체 뭐였을까 싶었다.
허탈할 만큼 싱겁게, 기다림은 끝났다.
8월 1일, 신분증(TIE)을 손에 쥐고 나오자 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결혼을 했으니, 결혼비자를 받는 건 당연한 거지만
내 나라가 아닌 여기에서는 끝없는 증명의 연속이었다.
이 당연한 일이 이렇게 ‘감격’스러운 일이 되는 나라, 여기가 바로 스페인이다.
나는 이 나라의 삶에 조금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이 나라는, 막 첫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었다.
관문 하나를 넘을 때마다, 또 다른 관문이 눈앞에 놓였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 정보 요약 TIP
비자 승인까지: 평균 2~5개월
TIE(외국인 신분증) 신청: 도착 후 30일 이내 필수
지문 등록 후 수령까지: 약 30~40일 소요
필수 서류: EX-17 양식, 세금 납부서(790-012, 약 €16), 여권 및 복사본, 사진, 주소등록증(empadronamiento)
Empadronamiento: 시청에서 신청, 보통 2일~수주 소요
모든 행정 절차는 Cita(예약제)로 운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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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에세이는 실명으로 연재되는 회복의 기록입니다.
� Luna Han 윤영의 연재 일정
《이혼해도 괜찮아》 :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끝난 결혼,
이제는 나를 위해 입을 여는 이야기.
《루나의 세비야》 : 매주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도시,
세비야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진실, 유죄》 : 매주 목요일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죄가 되는 시대.
그럼에도, 말해야만 회복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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