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몸무게가 된 남편 앞에서
남편은 수술 전 몸무게를 재니 50kg도 채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미스코리아 몸무게였다. 몸무게가 무슨 극비 사항이라도 되는 양, 그는 내 앞에서는 절대 체중계에 오르지 않았기에 그렇게 저체중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거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술 전후로 금식이 이어졌고, 이후에도 물과 다름없는 미음을 반 공기도 채 먹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혹시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병원에서는 영양수액을 투여했지만, 혈관 통증 때문에 영양제조차 끝까지 맞는 걸 힘들어했다. 매번 한 팩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중단해야 했다.
남편의 앙상한 몸을 숫자로 확인한 순간, 묘한 죄책감이 왈칵 밀려왔다. 원래 야윈 체형이거니 하며 무심하게 넘겼던 시간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서글픈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유방암 수술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고 관절통까지 앓고 있는 나를 대신해, 그동안 집안의 잡다한 일과 힘쓰는 일은 온전히 남편의 몫이었다. 속으로 그렇게 병이 생긴 줄도 모르고 아픈 아내를 위해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 온 그였다. 50kg도 안 되는 남편의 어깨를 보며, '이젠 내가 그 짐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막막함과 그동안의 미안함이 뒤엉켜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수술 후 몸에 부착돼 있던 여러 줄이 하나둘 제거되자, 회복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역시 숨통이 트였다. 콧줄을 떼고, 심장박동 체크 기계와 소변 줄까지 제거되니 몸이 제법 자유로워졌다. 수술 사흘 만에 무통 주사도 떼고 미음을 반 공기 먹었으며, 앉아 있는 시간도 늘고 복도를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 걷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것은 곧 퇴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퇴원을 앞두고 병원에서는 영양교육을 진행했다. 직장암 수술로 장루(인공항문) 주머니를 달게 된 환자들은 장을 쉬게 하기 위해 저잔사식, 즉 저섬유·저 찌꺼기 식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소화는 잘되지만 섬유질이 많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정작 남편은 식단보다 배에 달린 장루 주머니 자체에 눈에 띄게 위축되어 있었다. 장루 전담 간호사에게 관리 교육을 받고 직접 장루 주머니를 관리해야한다는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신의 낯선 몸을 마주할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밥숟가락을 들었다가도 이내 축 처진 어깨로 내려놓으며 극도로 식사를 자제했다. 회복을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하는데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장루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마음으로 안고 가느냐’의 문제였지만, 그 상실감 앞에서 남편이 태도를 바꾸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아 보였다.
수술 후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 회진 온 집도의는 수술 중 떼어낸 조직 검사 결과로 병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남편의 몸 상태로 과연 항암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깊어졌다. 이후 방사종양학과 협진 진료를 받았는데, 그 교수님의 의견은 또 달랐다. 항암보다는 방사선 치료가 더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의료지식이 없는 우리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교수님이 다시 논의한 끝에 방사선 치료 25회로 결론이 났다. 다만 남편의 심각한 저체중 상태를 고려해, 보통 수술 후 한 달쯤 지나 시작하는 방사선 치료를 한 달 반 뒤로 미루고 그 사이 체중을 늘려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우리는 병원에서 비교적 가까운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요양병원 경험이 있었던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 회복을 돕기 위한 과정이라며 남편을 설득했다. 집이 부산이라 매번 수술한 병원을 오가는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요양병원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수술 부위 상처 소독은 물론이고, 장루 주머니가 막혀 응급실을 오간 적도 있었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장루 전담 간호사에게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더군다나 까다로운 저잔사식 식사까지 병행해야 했으니 돌이켜보면 요양병원 입원은 참 현명한 결정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 남편의 체중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먹는 양은 분명 늘었는데 이상하게 살이 붙지 않았다. 이 앙상한 몸으로 방사선 치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남편의 생각을 물었다. 내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겪었던 고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양병원 진료과장에게 자문을 구하고, 유튜브를 찾아보며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재발 위험을 7~10% 정도 낮출 수 있다는 수치를 두고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쪽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막막함만 커져갔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남편의 의사였다. 방사선 치료 시작을 열흘 앞둔 어느 날, 남편은 결심한 듯 말했다.
“확률이 낮더라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방사선 치료를 받겠다.”
그 말을 듣고 난 뒤로는 두 번 다시 회의적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마다, 나는 조용히 남편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치료를 받는 사람은 남편이었지만, 그 시간을 함께 견디는 건 나의 몫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