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속에서 더 또렷해진 마음
양가 형제들에게 암밍아웃을 하고 나니, 우리 부부만 짊어지고 있던 걱정과 초조, 불안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괜히 말을 꺼내는 순간 상대까지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을 떠넘기는 건 아닐까 싶어 망설여 왔었다. 그런데 막상 마음을 열고 나니,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매일같이 걸려 오는 시누의 전화는 팍팍한 병원 생활 속 작은 숨통이었다. 하루는 남편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부아가 치밀어 있던 차에 마침 시누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핸드폰을 붙들고 열을 올렸다.
“아니, 아픈 건 아픈 건데,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몰라. 간호사들 앞에서도 툭툭거리고, 내가 속이 터져서 진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내 불평에 시누는 한 박자 쉬고,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아, 오빠는 와 진짜 그럴꼬?”
내 편을 들며 신나게 맞장구를 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오빠를 두둔하는 것도 아닌, 딱 절반쯤의 위로였다. 그 말에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만약 시누가 “그래도 오빠가 아파서 예민한 거니 언니가 이해해야지”라고 했다면, 나는 핏대를 세우며 2절, 3절까지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반쯤은 알아주는 듯한 그 무심하고도 다정한 한마디에, 바짝 올라 있던 나의 전의는 스르르 풀려버렸다. 이해받았다는 안도감에 맺혀 있던 불만도 1절에서 싱겁게 끝나 버렸다.
시누는 나와 동갑이라 그동안 만만하고 편하게 지내왔다. 격의 없이 웃고, 가끔은 툭툭 쏘아붙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남매 중에서 남편과 가장 가까운 사이다 보니 우리 집 속사정이나 남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이 검사실로 들어간 시간이나 수술이 진행되던 그 지난한 시간을 형제들이 없었다면 홀로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그 불안과 공포를 혼자 삼켜야 했다면, 아마 내 마음은 더 너덜너덜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수술 당일에도, 그 이후에도 근 열흘 동안 출석 도장을 찍다시피 병원을 찾은 사람이 또 있었다. 남편의 바로 위, 두 살 많은 형인 아주버님이었다.
남편은 어린 시절 아주버님에게 많이 맞고 자란 기억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놀부’라 부르며 서운함을 내비치곤 했다. 형제 사이에도 각자의 기억이 층층이 쌓여, 어른이 된 후의 관계까지 이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아주버님은 다정한 사람이다. 말수가 많지 않아도, 필요한 순간에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 일 년에 몇 번 보지 않아도 손길 하나, 눈빛 하나로 충분히 전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한 시간 넘는 거리를 오가며 남편을 짠한 눈으로 바라보고, 병원 복도를 함께 걸으며 운동도 시키고, 때로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헐렁한 환자복 차림의 남편이 링거대를 끌며 아주버님 곁에 붙어 어리광처럼 말을 건네면, 아주버님은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그렇게 형제애는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다시 자라고 있었다.
면회실에서 반찬통을 돌려드리고 새 반찬을 받던 날이었다. 마주 앉아, 플라스틱 통마다 꾹꾹 눌러 담긴 형님의 수고를 바라보다가 나는 참았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형님, 정말 죄송했어요. 형님 예전에 큰 수술 하셨을 때, 그리고 조카들 병원 생활로 그렇게 고생하셨을 때… 저는 먹고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몇 통에 위로금 조금 보내놓고 제 도리를 다했다고 착각했어요. 직접 겪어보니 그 시간이 얼마나 외롭고 막막했을지 이제야 알겠어요.”
말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떨렸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괜히 눈을 피하는 나에게 형님은 조용히 말했다.
“아냐, 다 지난간 일인걸… 그땐 우리 모두 제일 바쁘던 40대였잖아. 그리고 지금 이렇게 건강해졌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동서네도 곧 좋아질 테니 힘내.”
긴 말은 아니었지만, 나를 다독이는 형님의 붉어진 눈가에서 우리는 그동안 쌓여 있던 미안함과 서운함을 조용히 씻어내고 있었다. 많이 늦었지만 마음을 다해 사과를 하고 나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입맛에 맞지 않아 늘 절반 이상 남기던 요양병원의 밍밍한 식판 옆에, 형님이 챙겨다 준 반찬통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것은 단순한 밥반찬이 아니라 ‘어서 털고 일어나라’는 무언의 온기였다. 누군가의 수고가 담긴 밥상은 몸보다 마음을 먼저 살린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 달 반쯤 지나자 우리는 병원 식단에도 차츰 적응했고, 형님과 시누의 도움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도움을 받는 일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배웠다.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다. 형제자매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인생의 큰 고비를 어느 정도 지나온 지금에서야,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졌다는 사실이다. 아프고 나서야 서로를 더 애잔하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도. 건강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 아픔 앞에서는 또렷해진다.
아프지 않았다면 몰랐을 형제 간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완전히 좋은 일도, 완전히 나쁜 일도 없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상처는 남았지만, 그 자리에 관계가 깊어졌다면 그것 또한 삶의 한 방식일 것이다.
아프면서 비로소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아픔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픔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사랑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시간을 견뎌온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