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들이 시작되기까지 (1/1)
자, 이제 드디어 앞서의 여러 일들의 이유가 되었던 변화들, 그것들이 일어나던 시기로 돌아가서 부여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지요. 앞서의 내용 가운데 몇 가지 일들을 간단히 해당시기와 함께 정리하고 이번 편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부여夫餘라는 이름은 부서夫徐를 달리 적은 것으로 뒤에 부저夫沮를 통해 옥저沃沮 또는 부조夫租로 적게 된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서夫徐는 본래 불弗의 서쪽[西]이라는, 본래 있던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를 무리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불弗은 뒤에 달리 비沸로 바뀌었으니, 단-군의 아들 부루夫婁가 자리잡아 다스리다가 떠난 뒤에 그곳에 자리잡은 무리가 부루의 이름을 따서 - 왕검의 첫 도읍 평양-성을 왕검-성이라고 하였듯이 - 부루弗婁라고 하고 뒤에는 달리 비류沸流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단-군의 뜻으로 불의 서쪽 땅에 들어와 머무르던 조선 사람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된 부루를, 조선朝鮮을 줄여 적은 선鮮의 다른 모양 글자인 觧를 또한 다른 모양 글자인 해解를 써서 해부루解夫婁라고 하였으니, 그가 부여의 첫 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세간에서 부여의 시조라고 이르는 동명東明은, 부루가 떠난 뒤에 그곳에 와서 흘승-골-성에 머물러 왕 노릇을 하던, 부루와 갈라진 부여 사람들의 새 우두머리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이며, 부여에서 달아나서 고구려를 세우고 구려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지 부여의 시조가 아님을 이미 살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여의 왕 노릇을 하던 부루에게는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고 그리하여 나이많아 얻은 어린 금와를 얻어 아들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부루는 동명보다 1세대 앞선 금와보다 1세대가 아닌 2세대가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곧 주활동시기가 MC-28[+30)인 세대였던 동명보다 3세대 앞서 주활동시기가 90해 앞선 MC-118[+30)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처음 부여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주활동시기가 시작되던 시기보다 조금 앞선 MC-126/07[+3) 예의 우두머리가 조선-왕에게 등돌리고 한漢을 따르기로 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설치된 창해-군은 MC-125/01[+03)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서 한漢은 조선-왕을 없애고 4개 군들을 두었는데, 부여는 진-번-군의 땅에 먼저 자리잡아 옛 창해-군의 길을 통해 예가 있던 곳에 두었던 현토-군에 오고가는 길을 숙신에게서 지키며 한에서 그 댓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대 주활동시기가 끝나던 MC-88 즈음, 나이많은 그에게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으니, 이러한 상황을 노려 그 길 가운데 환桓 - 뒤에 고구려의 새 도읍 환도가 만들어지는 환-나-부가 있던 곳 - 에서 새 우두머리가 부루를 대신하여 부여 사람들 - 옛 조선 사람들 - 을 이끌겠다 하며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부여가 갈라지게 되니 그들이 지키던 길은 더이상 북쪽의 숙신에게서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길을 유지하는 부여에게 주던 댓가를 연, 제로부터 거두는 데에 부담을 느끼던 한漢은, 멀리 돌아가는 옛 길 대신, 진-번-군에서 예가 있던 현토-군에 이르는 새 길을 통하기로 하고, 진-번-군의 땅을 현토-군이 아울러 맡아 멀리 돌아가지 않고 바로 오고가는 길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MC-81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오고가던 북쪽 - 북명北溟 - 의 예와 뜻을 달리하던 남쪽 - 명溟 - 의 예는 창해-군을 없앤 일로 한을 의심하였기에, 현토-군의 힘이 나누어지자 같이 자리한 맥과 더불어 현토-군을 공격하였고, 그리하여 현토-군은 먼저 옛 진-번-군의 땅으로 옮겨졌습니다. 뒤에 요동-군의 오환이 흉노와 싸워 지친 틈을 타고 한의 범명우가 그들을 깨트리자, 한은 이곳에 성을 쌓고서 다시 현토-군을 옮겼습니다. 이것이 MC-74의 일이었습니다.
부루는 이 즈음 진-번-군이 없어진 뒤로 이로움을 얻을 수 없게 된 흘승-골-성의 무리에게, 그리고 그들이 맡은 길을 버려두고 동남쪽으로 떠나 북쪽의 예 사람들에게 가서 왕 노릇하였습니다. 이 때에 보다 남쪽의 예는 진번-군의 땅을 현토-군에 아우를 때에 마찬가지로 낙랑-군에 아울렀던 임둔-군의 땅 곧 낙랑-군의 동쪽 땅을, 현토-군과 마찬가지고 공격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동쪽 땅에 도위를 두고 보다 동쪽 예의 공격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던 상황에서 부여는 결국 북쪽 예의 땅에 들어와 머무르며 예의 물건을 낙랑-군 동쪽 땅을 통하여 한漢에 오고가도록 하는 일을 맡아서 이득을 얻었습니다. 옛 현토-군의 땅에 들어와 머무르기로 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부여를 달리 부조라고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 모두를 이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이루어내어 부여에게 다시 이로움을 얻을 길을 마련해준 뒤에 부루가 죽고 어린 나이의 금와가 부루의 자리를 이어 - 왕이 되어서는 - 부조라고 주변에서 부르던 부여 사람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은 여기, 이 시기입니다. 옛 현토-군과 옛 진-번-군의 땅, 그리고 금와와 함께 같은 세대에 해당하는 해모수의 주활동시기가 시작되던 MC-58 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