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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4편 부여夫餘 (2) #12

금와金蛙와 동명東明 (3/4)

by 잡동산이 Mar 11. 2025

앞서 글에서 부여의 5개 들이 - 새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쓰던 무리와 나머지 마-가, 우-가, 구-가, 저-가가 - 스리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 왕인 금와에게 등돌 사람들과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로 갈라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금와에게 등돌린 사람들이 결국 한을 따랐다고 하였는데, 이번 글에서는 이 일들을 먼저 바깥의 자료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의 일 곧 금와에게 등돌리고 부여에서 갈라진 무리가 한을 따르기로 하였던 일을,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옥저가 낙랑-군을 따랐다[2장 4편 #18 G-4:-②]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은 또한 한漢이 그 - 옥저의 - 땅이 넓 멀리 단단-대-산령 동쪽에 있다고 여겼다[2장 4편 #18 G-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③]고 적고, 이어 나누어 동-부로 하고서 도위를 두니 도위의 치治가 곧 불내-성이었다[2장 4편 #18 G-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고 적었습니다.


2장 4편 #18 G-4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옥저沃沮가 ② 돌아와서 낙랑(-군)[樂浪]을 따랐다[屬]. ①沃沮②還屬樂浪
2장 4편 #18 G-5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한漢은 ② (옥저의) 땅[土地]은 ● 넓게[廣] 멀리[遠] ③ 단단-대-(산)령[單單-大-領] 동쪽에 있다고 여겼다. ● (앞서) ④ 나누어 동-부[東-部]로 하고 도위都尉(= 위들[尉]의 우두머리[都])를 두었고 ⑤ (도위의) 치治는 불내-성[不耐-城]이었는데, ● (이 때에) 따로(= 떨어진) ⑥ (단단-대-산)령 동쪽의(= 동쪽에 있는) 7개 현들에(= 현들에 대해서도) 우두머리 노릇을 하니(= 하게 되니) ⑦ (이) 때 ⑧ 옥저沃沮가 ● 또한 ⑨ 모두 ⑩ (도위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현들[縣]이 되었다. ①漢②以土地●廣遠③在單單大領之東●④分置東部都尉⑤治不耐城●別⑥主領東七縣⑦時⑧沃沮●亦⑨皆爲縣


이것을 그저 보면, 마치 옥저가 낙랑-군을 따른 뒤에 옥저의 땅이 멀리 있었기에 갈라 동-부라고 하고서는 그곳을 맡을 도위를 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편이 인용한 전한서는 달리, 동-부의 도위를 두었던 곳은 - 아직 낙랑-군에 더하여지지 않았던 - 임둔-군과 낙랑-군 2개 군들의 땅이었다[2장 4편 #15 AE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전한서:-⑤]고 적었으며, 두었던 시기 시원 05년[2장 4편 #15 AE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전한서:]이라고 적었습니다.


2장 4편 #15 AE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전한서: 소-제[昭-帝]의 시원 05년 기해(-년)[己亥] ① 2(개) (군들) 바깥[外]의 부들[府]을 두었다. ● 이르기를 ② 조선朝鮮의 옛 땅이었던 평나平那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등을(= 등에 대해 두었던 부를) ③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라고 하였으며, ④ 임둔(-군)[臨屯], 낙랑(-군)[樂浪] 등 2(개) 군들[郡]의 땅에는 ⑤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두었다.(前漢書)昭帝始元五年己亥①置二外府●謂朝鮮舊地平那及玄菟郡等③爲平州都督府④臨屯樂浪等兩郡之地⑤置東部都尉府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이 임둔-군을 없앴다고 적고 있는 시원 05년[2장 4편 #16 H-2:-②] 곧 MC-81에 해당하는 시기, 앞서 살핀 바 옥저가 낙랑-군을 따MC-45 또는 MC-46보다 한참 앞선 시기에 한은 도위를 두었습니다. 이 때 군사를 맡아 거느리는 도위를  것은 임둔-군과 낙랑-군의 동쪽이 있던 예와 맥, 뒤이어 현토-군을 침범하여 구려로 옮겨가게 하였던 동쪽 변방 사람들[夷] 그리고 맥 사람들[貊] 때문이었습니다.


2장 4편 #16 H-2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① 소-제[昭-帝]의 시원 05년에 이르러 ② 임둔(-군)[臨屯], 진번(-군)[眞番]을 없앴다. ③ (임둔-군, 진번-군을) 낙랑(-군)[樂浪], 현토(-군)[玄菟]에 아우르도록 하였다. ①至昭帝始元五年②罷臨屯眞番③以幷樂浪玄菟


이 때 예는 단단-대-산령 동쪽과 서쪽 땅에, 맥은 단단-대-산령 서쪽 땅에 자리하였습니다. 이러한 곳들 가운데 맥이 있던 곳은 임둔-군의 여러 현들 가운데 7개 현들을 두려 이었으니, 이곳의 맥은 7개 무리였던 바 뒤에 7개 국들을 이루어 남쪽에서 일어난 신라와 손잡기도 하, 맞닿은 동쪽의 불내-현, 화려-현에서 보내 침범하도록 한 군사들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북쪽으로 옮겨간 현토-군본래 있던 곳, 그곳을 침범하였던 단단-대-산령 동쪽의 예가 본래 머물 뒤에 신라가 명-주[溟-州]를 두는 곳 가지고 그 북쪽에 있고 하여 달리 이름하 말하기를 북-명[北-溟]이라고 였던 곳니다. 여기에 해부루가 부여 사람들과 더불어 와서 다스 동-부여라고 하였 것입니다.


그 뒤 금와가 여기에서 해부루를 이어 왕이 되어서 부여를 다스릴 때에, 앞서 말했듯이 부여를 이루던 5개 부들이 뜻을 달리하 각각 둘로 그리하여 10개 무리로 갈라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우태와 함께 졸본으로 보내진 1개 무리를 제외한 9개 무리들 가운데 남쪽 5개 무리들이 와에게 등돌리고 한漢을 따 것이 앞서의 일입니다.


이러한 MC-45 또는 MC-46 일에 대해 적은 것이 삼국지 위서 동옥저편이 옥저가 낙랑-군을 따랐다고 적은 구절니다. 그러한 일에 대해서 이어지는 삼국지 위서 동옥저편의 구절들은 한이 옥저가 멀리 있는 땅이라고 여겼다고 적고 도위에 대해 - MC-81 - 동쪽 땅을 나누어 동-부로 하고 도위를 두었다고 적, 앞서 낙랑-군을 따랐고 적은  모두에 대해 도위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적은 것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편이 또한  일을 간단히 적었습니다. 먼저 단단-대-산령 서쪽이 - 그곳의 예 - 가 낙랑-군을 따랐다[J-2-(1):-②]고 적었는데, 이것은 단단-대-산령 서쪽 땅에 있던 예 단단-대-산령 동쪽 땅의 예와 달리, 맥과 뜻을 달리하여 보다 동쪽에 해당하는 낙랑-군과 임둔-군 동쪽 땅에 두어진 동-부의 도위를 따랐던 일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두어진 현들 가운데 하나가 도위의 치治 불내-현입니다.


J-2-(1)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편: ①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으로부터 서쪽[以西]이(= 서쪽 예가) ② 낙랑(-군)을 따랐다. ①自單單大山領以西②屬樂浪


이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편은 단단-대-산령 동쪽의 7개 현들에게 도위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 하였다[J-2-(2):①-]고 적어 오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7개 현들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이 옥저가 모두 도위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 하는 현들이 되었다[2장 4편 #18 G-5:⑦-⑩]고 적은 곳이니, 부여에서 금와에게 등돌렸던 5개 무리들에 해당하는 5개 현들과 그 남쪽의 예 가운데 함께 낙랑-군을 따른 2개 무리들에 해당하는 전막-현, 사두매-현입니다.


J-2-(2)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편: ① (단단-대-산)령 동쪽[以東] 7(개) 현들은 ② (동-부-)도위都尉가 ③ 그들[之]에게 우두머리 노릇을 하니[主] ● (그들은) ④ 모두 ⑤ 예濊가 (현의) 사람들이 되도록 하였다. ①自領以東七縣②都尉③主之●④皆⑤以濊⑥爲民


반면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의 앞서 구절들을 거의 그대로, 그러나 조금씩 말을 보태어 적었습니다. 단단-대-산령의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낙랑-군을 따랐다고 적어 마치 단단-대-산령의 동쪽에 맥이 또한 있었던 듯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S-(1)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① 단단-대(-산)령[單單-大-領]으로부터 동쪽 옥저沃沮, 예濊, 맥貊이 ② 모두 ③ 낙랑(-군)[樂浪]을 따랐다[屬]. ①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②悉③屬樂浪


이어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은 - 앞서 옥저, 예, 맥이 낙랑-군을 따른 - 뒤에[S-(2):①] 그 땅이 넓고 멀다고 여겨 단단-대-산령 동쪽 7개 현들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었다[S-(2):-]고 적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을 옮긴 앞의 구절들과 뒤의 구절들 사이에 새로 뒤[後]를 보태어 적고, 옥저와 예 뿐만 아니라 맥이 또한 7개 현들에 해당하는 듯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S-(2)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① 뒤에 ② 그 땅이 넓고 ③ 멀다고 여겨 ● 다시 ④ (단단-대-산)령 동쪽 7(개) 현들[縣]을 나누어 ⑤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①後②以境土③廣遠●復④分領東七縣⑤置樂浪東部都尉


그러나 일의 앞뒤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순서를 분명히 하고자 한 이러한 일들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의 문장의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하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편을 살펴 피할 수도 있던 오해를 흔들리지 않게 했을 뿐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내용을 옮기며 문장을 정리하여 그 뜻이 더욱 잘못 이해되도록 한 경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은 복잡한 내용을 예편으로 옮겨적고서 간단하게 옥저가 현들이 되도록 하였다[T-(1):-②]고 적고 이어 현들이 낙랑-군 동-부의 도-위를 따랐다[T-(1):①]고만 적었습니다. 더이상 말을 보태어 적지 않은 까닭에, 앞서와는 달리, 뜻이 잘못 이해되지지 않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T-(1)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 다시 ① 옥저沃沮가 ② 현들[縣]이 되도록 하였다. 更①以沃沮②爲縣
T-(2)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 (현들이) ①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따랐다[屬]. ①屬樂浪東部都尉




그러나, 곧이어 그렇게 낙랑-군 동-부의 도위를 따른 7개 현들 가운데 제일 남쪽의 부조-현과 그 남쪽 전막-현, 사두매-현을 제외한 나머지 4개 현들은 곧바로 한을 따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조-현이 있는 곳의 무리와 구분하여 르기를 북-옥저라고 하고 그 남쪽 부조-현이 있는 곳의 무리를 남-옥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앞서 살핀 바 낙랑군 호구부 목간에는 옥저를 앞서 모두라고 하였던 것과 달리 옥저는 부조-현라는 1개 현으로 적혀있게 되었습니다. 한을 따르고서 곧 마음을 바꾼 나머지 4개 현들에 해당하는 무리를 이르는 북-옥저는, 뒤에 고구려 동명-성왕이 사람들을 보내 깨트리는 바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가운데 동쪽 바닷가에 이르는 무리들 만이 남았고, 고구려-위 전쟁에서 모습을 보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면, 북-옥저 무리가 그 뒤 한漢을 곧 따르지 않은 반면에 남-옥저가 곧 부조-현에 해당하는 무리들이 한을 따른 것과, 앞서 익숙함에 맞추어 부여라고 적은 부서에서 이어지는 부조라는 그 이름을 한漢과의 사이에서 쓴 것을 통해 보면, 남옥저는 부여가 앞서 그리하였듯이 한과 오고가며 이로움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해칠 갈등을 금와가 일으키자 그에게 등돌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漢을 곧 따르지 않기로 한 북-옥저 곧 부여의 남쪽 무리는 한漢과 오고가지 않았는데, 그 결과 부여 또한 한과의 사이에서 오고가는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옛 현토-군이 있던 곳에 자리한 남-옥저가 부여를 따르지 않아, 서북쪽으로 가서 졸본에 이르는 길조자 잃은 부여에게 남은 길은 이제 북쪽으로 가서 서쪽으로 돌아 요동-군에 이르는 옛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에는 해모수의 아버지가 맡은 환桓 곧 환-나와 해모수가 앞서 맡았던 흘승-골-성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해모수와 그 아버지가 맡은 길을 쓰기 위해서 부여는 먼저 북쪽으로 나아가서 다시 그곳에서 북쪽의 숙신을 막으며 서쪽으로 가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여는 먼저 북쪽으로 옮겨가게 되니, 이곳은 뒤의 고구려보다 북쪽에 있어 북-부여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에 자리잡은 뒤 부여는 서쪽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그것은 곧 길 북쪽의 숙신과의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열었다고 해도 금와  길을 쓰기 위해서는 다시 설득해야 하는 상대는 여전히 남아있었으니 바로 해모수와 그 아버지였습니다. 물론 졸본에 머무는 무리를 통해 해모수에게 영향을 줄지만, 다른 무리들처럼 등돌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금와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그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분명한 수단이 필요했, 그리하여 해모수의 아버지가 아란불에게 해모수에 이어 흘승-골-성에 가서 도읍하도록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그 손자 동명을 곁에 두었습니다. 금와는, 새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삼던 무리 가운데 자신의  잘 따르던 사람들이 우태 함졸본으로 간 뒤도 부여에  동명을 맡았던 람들이 그 뒤 금와에게 등돌 까닭에, 맡아 사람이 없어진 동명을 다시 우-가에게 맡겼 것입니다.


그리하였으나 동명이 자라며 그 재주가 예상보다 뛰어나자, 대소가 금와에게 꾀하는 - 동명을 해모수와 해모수의 아버지에 대한 볼모로 삼는 일 - 을 두르도록 권하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 죽이도록 하니다. 금와는 그러나 이 때 동명을 죽이는 대신 마-가에 맡겨 시험하도록 하였으니, 아직 동명의 볼모로서의 가치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금와는 여전히 그를 통해 해모수에게 길을 양보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앞서 자료들을 통해 살핀 이야기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MC-81 1) 한이 현토-군에서 옛 조선의 평양-성 - 현재의 평양-시가 있는 곳과는 다른 곳 - 을 지나서 진번-군에 이르는 길을 열고자 하여 평나-도독-부를 둠. 2) 현토-군의 남쪽이면서 낙랑-군, 임둔-군의 동쪽인 곳에 있는 예를 경계하여, 낙랑-군, 임둔-군의 동쪽 땅을 동-부로 하고 도위를 둠. 3) 임둔-군을 없애고 낙랑-군에 아우름. 4) 진번-군을 없애고 현토-군에 아우름. 5) 예와 맥의 침범으로 현토-군이 옛 땅을 버리고 구려로 이동.

MC-74 1) 흘승-골-성의 부여가 옛 현토-군의 땅으로 이동. 2) 현토-군이 다시 구려 서북쪽으로 이동.

MC-58/04 흘승-골-성에 내려온 해모수가 움직여 유화, 하-백과 만남. 금와가 유화를 데려감.

MC-57/01 유화가 동명을 낳음.

MC-57/04 유화가 동명을 세상에 내어보임.

MC-46[+2) 부여의 우태가 졸본의 소서노와 혼인, 떠난 사람들이 본래 맡았던 동명을 새로 우-가가 맡음.

MC-46[+2) 5개 가들 가운데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북쪽의 부여를 떠나, 전막, 부조와 함께 한 낙랑-군을 따름. 불내-현을 치로 하여 단단대산령 서쪽의 예를 다스리던 도위가 맡아 단단대산령 동쪽의 그들에게 우두머리 노릇을 함. 부여가 북쪽으로 옮겨 머무름.

MC-45 앞서 따른 사람들이 이루던 5개 무리들 가운데 부조-현에 해당하는 무리(= 뒤의 남-옥저)를 제외한 나머지 4개 무리들은(= 뒤의 북-옥저는) 한을 따르지 않기로 함.




그렇게 동명을 마-가에 맡겨 대소를 달래던, 곧 동명을 죽이려고 하지 않던 금와는 그 뒤 어느 시점부터 태도를 바꾸어서는 동명을 죽일 것을 사람들에게 허락하였습니다. 앞서의 일로 미루어보면  까닭은 분명하니, 동명의 볼모로서의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금와가 기대하던 길을 동명을 통해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떻게 그러함을 알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러한 상황을 고스란히 담은 자료들을 다음 글에서 살펴 야기를 이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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