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담당하는 법관은 통상적으로 2년 주기로 사무분담이 바뀌어왔다.
법원생활 20년 동안 가정법원에 7년간 적을 두며 가사전문법관으로 일했고,
가정법원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이혼소송을 담당하고 있다.
엄청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첫 이혼사건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2011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빽빽한 빛의 고장, 밀양에서 판사 생활 7년 차에 처음으로 협의이혼의사확인을 하게 되었다(가정법원 판사들 사이에서는 협의이혼의사확인하는 것을 이혼주례한다고 은어적으로 표현한다)
결혼식은 수도 없이 가보았지만 이혼식은 처음이라 너무나 긴장되었다. 더더군다나 이혼주례라니….
이혼의사확인기일의 절차를 숙지하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혼자 오만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나를 끝으로 부부들은 이제 그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구나란 생각에 가슴 한편이 묵직하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겠지?
그런데 이혼한다고 꼭 그렇게 근엄하게만 있어야 하는 걸까?
깨어진 관계로 상처받고 힘들었을 이들에게 무미건조한 표정과 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혼하기로 합의한 것 맞습니까?” “양 당사자 사이에 이혼하기로 의사가 합치되었음을 확인합니다”만 읊다가 보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것은 없는 걸까?
그런데 막상 협의이혼실에 들어간 첫날, 그 수많은 고민과 상념이 무색하게도, 무미건조한 표정과 형식적인 어투로, 해야 할 말만 하고는 후다닥 이혼주례를 마쳤다. 안 그런 척했지만, 솔직히 너무나 떨리고 긴장된 나머지 시나리오 외에 다른 액션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신없이 이혼주례를 마치고 사무실에 올라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허무함에 오랜 시간 넋을 놓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을 할 때는 그렇게 오랜 기간 준비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우고 그 하루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데, 이혼절차는 그 시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허무하리만치 속전속결이었다.
이혼주례를 진행하면서 속으로 ‘에게, 이게 뭐야. 진짜 이렇게 끝나는 거라고?’를 되뇌었다. 결혼식 당일 수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을 그들은 판사의 “이혼하기로 합의하였음을 확인합니다”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싸늘한 눈빛조차 교환하지 않은 채 각자 필요한 서류를 챙겨 들고 생기 없는 얼굴로 돌아갔다.
첫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 슬슬 정신이 차려질 즈음부터 협의이혼실에 온 부부들에게 형식적인 주례 외에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어보기도 하고, 심지어 젊은 부부들을 설득하여 협의이혼신청을 취하시키고 돌려보내기도 해 보았다.
인생 선배랍시고 어쭙잖은 충고 몇 마디와 함께...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는 혈기왕성한 30대 중반의 젊은 판사였고, 시골법원이라 사건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려보냈던 그 젊은 부부가 지금도 잘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밀양을 떠난 뒤 이혼사건과 이별하여 잊고 지내다가, 2017년 부산가정법원 가사전문법관으로 선정되어 다시 이혼하게 되었다. 긴긴 시간 매일매일 이혼하면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여자로서, 판사로서 많이 힘들었고 아팠으며 분노했다.
나 역시 남편의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관계가 나빴던 적이 있었기에,
사건 속의 그와 그녀가 종이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3명의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기에,
사건 속의 아이들이 내 마음을 부둥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그녀에게 나만의 이혼주례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