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 사유를 항해하는 여행자

Navegante : 리스본과 페소아

by viajera 비아헤라

리스본 교통카드의 이름은 viva viagem이었지만, 언젠가부터 navegate로 바뀌었다. 앞선 글들을 읽었다면 묘하게 기시감이 들것이다. viva viagem이라는 이름 속에는 지난 리스본 편에서 다뤘던 viagem이, navegate는 세비아 편에서 travesía(항해, 여정)와 비교했던 navegación이 떠오를 테니...


navegante는 포르투갈어로 항해자를 의미한다. 라틴어 navis(배), agere(움직이다, 몰다) navigare(배를 타다, 항해하다)에서 유래하였으며, '항해하는 사람'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사람, 길을 개척하는 사람처럼 문학적인 뉘앙스를 내포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리스본 문학에는 양대산맥이 있다. 한 명은 지난 편에 다뤘던 주제 사라마구, 또 다른 한 명은 『불안의 서』로 유명한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는 그의 치열한 자기 인식과 끊임없는 내면 성찰, 자아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 존재의 허무에서 오는 고독을 페소아만의 파편적 사색으로 담고 있다. 철학적 단상, 고백적 삶의 기록이면서도 시적인 이 산문은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많은 항구로 향하는 배가 있지만, 삶이 고통 없는 곳에 닿는 배는 단 하나도 없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자기-자신-모름을 참을성 있게 그리고 강렬하게 분석하고 우리 의식의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기록하는 일. 독립적인 그림자의 형이상학, 환멸의 황혼을 시로 기록하는 일보다 진실로 위대한 인간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없다."


"가족도 아는 사람도 하나도 갖지 않은 쾌적함. 그 기분 좋은 추방의 느낌. 추방된 자의 자부심과 막연한 희열이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희미한 불편함을 둔화시킨다. 이 모두를 나는 내 방식으로 냉담하게 즐긴다."


"나는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이다."


페소아의 글을 읽으면 예민한 감각과 예리한 자기 인식 건조한 배에 고독이라는 돛을 달고 사유라는 바다 위를 유유히 떠다니며 항해하는 것만 같다. 어느새 나도 그 배 위에 올라타 우리는 함께 바람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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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아침. 샌드위치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어느새 가득 쌓인 빨랫감을 꾸역꾸역 가방에 밀어 넣고 근처 셀프 런더리로 갔다. 불은 켜져 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찰나에,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분이 문 옆에 버튼을 눌러야 열린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들어가 먼저 세탁기를 돌리고, 가방 안쪽에 넣어온 책을 꺼냈다. 바로 지금이 내가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으로 손꼽는 시간이다. 낯선 도시의 인적 드문 골목에 자리한 빨래방. 낮게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빨래더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읽어 내려가는 순간. 이질적인 공간 속에 덩그러니 앉아 익숙한 문자들을 바로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멈추고 활자만이 튀어올라 춤을 추는 것만 같다. 시곗바늘이 세탁기의 회전 속도를 따라 함께 세차게 달린 것인지 어느새 기계는 제 할 일을 끝내고 축 늘어진 젖은 빨랫감을 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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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부분까지 가름끈으로 표시해 둔 책을 얌전히 내려놨다가, 건조기를 돌린 후 다시 책을 집어 든다. 그러기를 잠시, 금세 기계는 빳빳하게 바삭해진 빨래를 뜨거운 김과 함께 뱉어낸다. 깨끗해진 빨랫감을 잘 개어 다시 가방에 차곡차곡 넣은 후 문을 나선다. 여행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편안한 차림으로 셀프세탁을 하고 리스본의 아침거리를 걷는 내 모습이 어쩐지 조금은 이 도시의 일상의 단편 속으로 스며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몽글몽글해진다.




우마 레스토랑이 유명하다고 해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맞으며 찾아갔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휴무였다. 배가 고팠던 참이라 근처에 열려있는 식당을 찾다가 O Arco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문어밥과 대구튀김, 그리고 슈퍼복 스타우트를 시켰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라 맛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맛있었다. 대구튀김의 적당한 간과 밑에 깔린 감자가 정말 정말 맛있었다. 문어밥의 문어도 부드럽고 간도 맛있게 짭짤해서 연신 감탄을 하며 먹었다. 우마는 안 가봐서 맛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연히 찾은 행복감에 우마에 못 간 아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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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페소아가 아름답다고 한 풍경을 보기 위해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긴 대기줄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탑승하니 오래된 승강기가 덜컹거리며 전망대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주황색 지붕으로 뒤덮인 리스본의 시내 전망은 낭만적이었다. 비가 와서 흐리고 안개가 꼈지만, 또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운행 간격이 생각보다 길어 얼추 같이 올라온 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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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에 가서 나타와 진자냐를 시켰다. 필링은 벨렘보다 조금 더 묽었지만 페스트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바삭했다. 조리실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제빵 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코 앞에서 바라보며 나타를 먹으니 어쩐지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함께 시킨 진자냐는 생각보다 독해서 호로록 한입에 털어 마시고는 씁쓸해진 입안에 나타를 얼른 쏙 집어넣었다. 건물 외관과 제빵 하는 장면을 함께 찍으려고 하니 센스 있는 제빵사분들이 냅다 엄지 척 포즈를 취해주었다. 달디 단 유쾌함에 즐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진을 다 찍고 나도 그들에게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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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겨 카페 브라질레리아로 향했다. 페소아가 즐겨 찾았던 카페라 해서 리스본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곳이었다. 브라질레리아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앞에 놓인 페소아 동상을 바라보며 이 카페에서 누구를 만나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써내려 갔을까 사색에 빠졌다가, 따뜻한 난로 옆에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페소아처럼 글도 써보았다. 페소아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시간이지만 페소아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페소아와 함께인 것 같아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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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를 따라 사유의 바다를 항해한 끝에 다다른 정박지는,


결국 나의 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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