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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 Oct 22. 2024

움직임이 많은 막내아들과 비상식적인 그 어머니

2012년 3월부터 19년 10월까지 8년 가까이 첫 번째 이웃으로부터 층간 소음의 일들을 겪었고, 우리 집의 위층에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아이와 아마도 세 살 터울인 남학생이 그들의 부모들과 살고 있었다. 첫째 아들은 우리 집과 다투는 것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제구실을 하지 못하며 아내의 편에 서 있었고, 그 어머니 되는 여자와 막내아들이 주로 나와 다투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층간 소음의 피해를 겪게 된 것은 위층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이었다. 원인이 위층에 있었다. 위층에 살고 있는 그 이웃의 막내아들이 원인 제공을 했다. 학교나 집 밖에서는 위축되어 있어서 자기 발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지내면서 자기 발산을 하느라 움직임이 많았고 굉장히 요란스러웠다. 나는 위층에 환자가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만큼 움직임이 많고 요란스러웠다. 아동기 후반의 남자아이라서 움직임이 과한 점이 있었다. 그렇게 이해를 해보려고도 했지만 나의 인내심으로는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아무리 아동기 후반의 남자 아이라지만 좀 유난스럽게 요란스럽고 비정상 범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이는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시기인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지내는 듯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지냈다. 겉모습은 여자아이같이 예쁘장하게 생겼고, 체구가 보통 아이들과는 확연히 비교가 될 정도로 작았다. 길에서 마주치면 한눈에 확 들어올 정도였다. 성격은 연약함이 많았고 그 정도도 큰 편이었다. 또래의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가 쉬운 성격이었다. 그 부모들이 지닌 성격이 그러했고 또 그런 아이를 연약하도록 키웠으니, 그 아이가 얼마나 연약하게 자랐을 터인가. 그 아이는 성격적으로 그 어머니를 가까이 닮았다. 

그러니 막내아들을 귀하고 귀하게 여겼을 그 어머니가 이렇게 저렇게 고민이나 걱정이 많았을 터다. 그 여자의 근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기 아들을 감싸며 나를 향해 분노했을 것이다. 언제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을 때 나더러 나의 부모님이 나 때문에 걱정이 많겠다는 말을 건넸는데, 그것은 자기가 경험하는 이야기를 나에게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또 언제인가는 내가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섰을 때 따라 나오면서 “내가 너 때문에!”라며 나를 향해 원망과 분노를 내뱉었다. 자기 아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힘든 점을 나를 향하여 탓하는 것이었는데, 참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굉장히 감정적이었고 비상식적이었다. 그리고 나와 다투는 일에 대해 굉장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언제인가는 자기가 우리 집의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느냐는 말을 했다. 상식을 벗어난 생각과 말이다. 남의 집에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겠다니. 상식적으로 보기에 참 황당한 생각과 말이다. 그 여자의 비상식은 그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언제인가는 우리 집에 누군가 들어온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현관 앞에 세워둔 이젤이 엎어져 있거나, 엄마 화장대 서랍 속에 있는 립스틱이 깊게 패어 있다거나. 누군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것 말고도 그 여자의 비상식은 여러 면에서 보였다.

나의 생활 패턴이나 우리 집의 생활에 관심을 보이며 자기가 파악을 하려고 하는 행동을 보였다. 언제인가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밖에서 두 아들들을 아파트 출입문 앞에 세워놓고 자기도 같이 서 있더라.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또 우리 엄마를 만나고 싶을 때는 만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곤 했다. 우리 엄마가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 언제인가는 내가 외출할 때 바로 따라 나와서는 싸움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법적으로 걸리는 일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외출을 나가는 나를 바로 가까이 따라다니며 싸움을 걸긴 했지만 내 팔을 붙잡거나 하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언제 외출을 하는지 가까이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와 우리 집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자기 손안에 놓고서 이런저런 행동을 취하려 했다.


그리고 2012년 여름쯤인가, 그때부터는 우리 집을 감시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느낌으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을 향해 취하는 행동이 우리 집의 특정 상황과 딱 들어맞는 상황들이 일어났다. 마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위층에서 일으키는 소음이 딱 내가 있는 위치에서만 일어났고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엄마가 계신 곳은 아주 조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마를 내 쪽으로 오시도록 부르거나 소음을 피해 엄마 옆에 있으려 하기도 했었다. 엄마가 내 옆에 있으면 딱 조용해졌다.

그 여자는 우리 엄마가 오전에 운동을 하러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다가 엄마가 집을 나가시면 딱 그때부터 미친 듯이 분노 풀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보통 그 여자의 분노 풀이는 한 시간 정도면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리고 엄마가 집에 들어오시면 그때부터 딱 행동을 그쳤다. 그리고 내가 아침에 깨어 일어날 때, 식사 전에, 쉬고 있을 때,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공격을 해대었고, 매일매일 그렇게 했다. 그것은 내가 있는 위치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부모님이 계신 위치는 조용했다. 또 내가 집에서 혼자 이야기를 한 내용을 경비 아저씨가 알고서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갈 때 그것을 알고 있던 듯이 바로 따라 나와서 어떤 행동을 하기도 했다. 따라 나와서 내게 시비를 건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 여자는 나와 우리 집 상황에 딱 맞추어서 어떤 행동들을 했다. 매일, 하루 종일.

외출을 잘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틈이 없는 감시 속에서 거의 내내 소음을 일으켰다. 그 여자는 하루 중에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내내 나를 감시하고 따라다니며 분노 풀이를 하거나 괴롭혔다. 정신이 정상이 아닌 사람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분노하고 괴롭힘을 하며 달라붙어 있으니, 이 집에서 내게 자유롭고 편안한 시간은 없었다. 나도 집에서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일들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방법을 찾아봤지만 찾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가 없이 감시 당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야 했고, 나는 그 상황을 역으로 이용했다. 위층의 남자아이나 그 여자의 한심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거나 그들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을 했다. 남자아이를 향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을 하자 위에서 바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참 어리고 연약하고 어리석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나는 잘 적응해서 지내게 되었다. 내가 층간 소음을 겪고 있는데 위층 집에서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면 그 누구도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정신 질환이 있는 것으로 몰아져서,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누구에게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위층이 시끄럽다고 정도만 말할 뿐이었다. 병원에서 내 담당 선생님께도 내가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말한 적 없다. 그냥 내가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정도만 이야기했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13년째 유지되고 있다. 첫 번째 이웃이 이사를 가고 두 번째 이웃이 이사를 왔고, 두 번째 이웃이 이사를 가고 세 번째 이웃이 이사를 온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대물림되어서 똑같은 패턴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감시를 하면서 통제와 괴롭힘과 가해 행위를 해왔으니, 그것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니 내가 이 집에서 제대로 살 수가 없고 2년 넘게 정신과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 이사를 갈 생각도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시 아래의 층간 소음을 우리 집에서 나만 겪고 있었고 부모님의 공감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사를 간다는 것 자체도 큰 일이었다. 엄마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더욱 힘이 들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두려움 때문에. 모든 일들에는 끝이 있고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인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온다라고 한다면 너무 늦어지는 것 같다. 언젠가는 이 비정상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날이 올 것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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